원평동 역사유적
스토리텔링사업이
멋지게 이뤄지길
소망한다

 

   
▲ 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지난여름 일본 교토를 여행했다. 천년의 수도 교토는 생각했던 것보다 후줄근했다. 몇 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 집들과 골목, 오래된 가게들, 사람들. 그들의 삶은 도시의 풍경만큼이나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마을마다 골목마다 사찰과 신사가 있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관광·교육 도시 교토의 힘이며 경쟁력으로 비춰졌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로마지만 여유를 갖고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2000년 전의 로마, 1000년 전의 중세도시가 펼쳐진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꿈꾸며 살고 있다. 피렌체의 뒷골목 어디를 가도 만나는 메디치가, 미켈란젤로의 건축과 그림, 수 백 년 손때 뭍은 성당, 골목 어딘가에서 아직도 중세 유럽처럼 도제식으로 상품을 만드는 장인들. 나는 그들이 부럽다.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레 품고 사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평택은 2000년이 넘는 도시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 그곳이 평택이다. 그렇지만 지난 2000년 동안 평택은 역사의 변방에만 머물렀다. 국가와 지배층의 수탈지역이었고, 전란戰亂 때는 모래알처럼 흩어졌다가 흉년들어 배고파지면 다시 모여들었던 낮은 자들의 고장이었다. 근대 이후 철도가 놓이고 미군기지가 주둔했어도, 100만의 도시를 꿈꾸며 도시를 확장하고 공장과 항만을 건설하는 오늘날에도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그러다보니 평택시민은 자긍심이 약했다. 평택사람이라는 정체성, 자손대대로 뼈를 묻고 살겠다는 정주의식도 희미했다. 잠시 머물다 돈을 벌면 떠나고 싶어 하는 뜨내기들의 고장.

자신들의 문화에 자긍심이 약하면 누군가에게 내어놓고 싶지 않은 것이 기본심리다. 자기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누군가가 규정한 가치기준, 판단기준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평택 역사를 일군 주체는 민중이다. 역사의 변방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계곡을 메우고 갯벌을 옥토로 만들었다. 평택들판과 바다에서 단련된 구릿빛 얼굴, 이름 없는 민중이 주도했던 3.1운동은 그래서 가치 있다. 금수저로 태어나고 출세해 승승장구했던 인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진정성이 있다.

이번에 원평동사무소에서 원평동, 군문동 일대의 역사유적을 스토리텔링 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일명 ‘원평동 톺아보기 사업’이다. 늦었지만 참 반가운 일이다. 원평동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형성된 근대도시다. 근대교통이 편리한데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빠르게 근대도시의 변모를 갖춰갔다. 평택군청과 경찰서, 읍사무소, 평택세무서, 평택우체국 같은 공공기관과 근대시설이 밀집했고, 평택장에는 평택평야의 곡물과 황해의 물산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평택지역 근대도시의 상징과도 같았던 원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도시의 중심이 철도 동쪽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잊힌 슬럼지역이 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 원평동을 지칭했던 ‘뚝너머’라는 별칭은 오랫동안 원평동 주민의 자긍심을 크게 훼손했다.

원평동장이 내민 청사진에는 눈에 띄는 내용이 많았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주변 인사들에게 자문諮問 한 결과일 것이다. 원평동 골목골목, 평택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 군문교, 평택역과 평택평야를 연결했던 군문포에 표지석을 세워 스토리텔링하고, 본정통 일본인 거리와 평택장터를 재현하며, 평택 3.1운동의 성지 구 평택역광장에 표석을 세우는 사업은 눈에 확 띄는 내용이다. 원평동의 발 빠른 행보에 평택의 구 중심이었던 진위면과 팽성읍도 발 벗고 나섰다. 필자는 원평동장의 꿈과 이번 프로젝트가 멋지게 이뤄지길 소망한다. 평택시와 시장의 관심과 지원이 끈기지 않기를 기대한다. 평택문화원과 지역사전문가들의 적극적 참여와 지원도 기대한다. 평택시민이 원평동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 원평동 주민이 자긍심을 갖고 대대손손 원평동에서 살아가는 그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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