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경기도 4대 시나위
동령·안산·남양·광주제는
평택의 음악인들을 통해
전승되고 지켜져 왔다

 

동령제東嶺制, 방용현이 창시자로 경기시나위 육성에 큰 영향
안산제安山制, 지영희의 율제篥制로 경기민요처럼 가볍고 경쾌
남양제南陽制, 방돌근의 율제篥制로 목튀김과 즉흥적 연주가 특징

 

▲ 평택호풍어제를 진행하기 위해 정박중인 어선들


Ⅲ. 평택의 예인藝人
2. 기악

■ 평택의 경기시나위

경기도의 4대 시나위라 할 수 있는 동령제, 안산제, 남양제, 광주제 가운데 광주제를 제외한 남양제, 동령제, 안산제는 평택의 전통음악인들을 통해 전승되고 지켜져 왔다. 이는 한강이남지역의 경기도당굿과 경기시나위를 대부분 평택에서 계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시나위 동령제東嶺制는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에서 태어난 시나위 명인 방용현方龍鉉의 율제篥制로 방용현은 다른 연주자들과 비교했을 때 호흡이나 기량이 매우 뛰어났는데 이 같은 기량이나 호흡의 장점을 살려 연주를 즉흥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대금 시나위 명인 방용현은 무업을 대물림한 평택지역의 대표적 세습무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금과 해금 명인 방용현은 마을 악사에서부터 시작해 서울 왕십리로 이주해 대금과 해금 학습에 모든 것을 걸었다. 처음에는 굿판에서 악사로 활약했으나 조선음률협회 정회원으로 점차 연주의 완숙도가 높아감에 따라 각종 연주회와 방송 녹화, 해외공연에 초청돼 경륜을 쌓아가면서 시나위 대가로 활약했다.

그만의 즉흥적 가락과 기교가 특징인 경기시나위 동령제東嶺制는 김원식, 이충선, 김광식에게 전승되었다. 방용현의 수제자 김광식의 대금 음악은 《대금교본》에 악보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평택 출신 시나위 명인 지영희가 채보해 1969년 국악예술학교에서 편찬한 것이다.

수제자인 이충선은 이후 경기시나위 광주제를 창시해낸 인물이기 때문에 광주제 또한 일정부분 방용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방용현은 또 같은 평택 출신인 해금 시나위 명인 지영희에게도 대금 산조와 풍류를 가르쳤다. 동령제는 방용현이 제자 김광채金光彩에게 전수했으나 지금은 그 맥이 끊어졌다.

대금 시나위 명인 방용현의 핏속에 흐르는 예술적 혼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경기도당굿의 마지막 시나위 연주자이자 남양제 전승자인 방돌근(방인근)이 그의 손자이며, 증손녀의 딸도 한영숙류 춤을 전수해 활동하고 있다.

경기시나위 안산제安山制는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태어난 시나위 명인 지영희池瑛熙의 율제篥制로 해금산조는 대금산조의 선율을 많이 본받았고 섬세하고 굴곡이 많으며, 경기민요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 중중머리 부분에서는 장단 사이로 드나드는 가락의 놀음새와 잉어질의 익살스러운 연주법이 특색 있다. 피리 연주는 더름치기, 혀치기, 목튀김 같은 특수 주법을 구사해 다른 연주자들이 범접할 수 없는 그만의 특징을 갖고 있다.

지영희의 피리시나위는 ‘푸살’ (4/10박, 4/15박) 장단이나 굿거리(12/8) 장단과 비슷한 2소박 6박의 경기도당굿 섭채 장단(6/4) 형태의 가락으로 짜여 있으며, 국악예술학교 졸업생들에게 전승되어 많이 연주되고 있다. 지영희의 경기시나위는 남도시나위 특징인 G(굵게 떠는 음), Eb→D(꺾어서 떠는 음), C(본청 : 뻗다가 가늘게 떠는 음) 음을 기본으로 하며, 남도시나위에선 나타나지 않는 굵게 떠는음 G음의 위쪽 지공음인 Bb→A음을 꺾어서 굵게 떠는 것이 경기시나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영희의 경기시나위 가락은 박범훈류 피리산조 중중모리 가락에 첨부되어 있으며 가락의 짜임새가 상당히 세련되어 있어서 현재 독주곡으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또한 지영희류 해금산조 역시 연주자들에 의해서 가장 활발하게 연주되는 독주곡이다.

해금 시나위 명인 지영희는 할머니 전석준을 비롯해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등이 무업巫業을 생계로 하는 세습무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경기도당굿과 경기시나위를 접하며 살았다. 11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속음악을 학습한 지영희는 활동영역을 평택이 아닌 서울로 옮겨가 조항련, 정태신, 지용구, 양경원, 김계선, 방용현, 최군선, 오덕환, 박춘재, 한성준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명인들에게 전통음악과 무용을 전수받아 다양한 장르의 예술분야를 섭렵하게 된다.

조선음악무용연구소와 한성준음악무용단, 최승희무용단, 대한국악원, 지영희고전음악연구소 활동을 통해 음악세계를 넓혀간 지영희는 민속음악과 무속음악의 채보, 작곡, 교육, 관현악연주로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경기시나위 안산제는 현재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와 최경만, 박범훈, 김영재, 최태현, 이철주, 김방현, 장덕화, 김덕수 등으로 이어져 활발히 전승되어 오고 있다.

경기시나위 남양제南陽制는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에서 태어난 시나위 명인 방돌근方乭根의 율제篥制로 방돌근의 피리시나위 특징은 지영희 시나위와 선율진행이 비슷하나 가끔씩 목튀김(피리서로 연주하며 목을 튀기는 소리)을 하면서 연주하는 것이며, 일정한 가락으로 짜인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연주한 것이다.

남양제는 옛 수원군 남양면 출신 장만용이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세습무가世襲巫家인 그는 아들 장점학(장점복)과 손자 장유순에게 대대로 예능적 재능을 전해줬고, 이후 경기도당굿 전수조교였던 방돌근에게 전수됐다.

대금 시나위 명인 방돌근方乭根은 세습무가世襲巫家로 할아버지가 바로 경기시나위 동령제東嶺制 창시자인 방용현方龍鉉이다. 동령마을 방씨 집안은 명이 짧아 천한 이름과 천한 직업을 가져야 장수한다는 믿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직업인 화랭이를 선택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원으로 올라가 경기시나위 남양제 대가로 경기재인청 출신 장유순에게 피리시나위를 학습해 남양제 시나위를 물려받은 후 경기재인청 도대방 가문인 오산시 거주 이용우에게 경기무악 장단과 도당굿 장단을 전수받았다. 굿판에 들어서 40년이 넘는 세월을 경기시나위와 인연을 맺어가면서도 보다 넓은 세상에 시나위를 알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경기도당굿 녹음과 방송활동으로 이어졌으며, 국립국악고등학교 국악 강사로 활동하면서 김현주, 안재숙, 김현숙, 김흥수, 승경숙, 목진호, 장영근 등에게 경기도당굿 장단의 정통을 잇게 했다.

경기시나위 광주제廣州制는 경기도 광주시 중대면 몽촌에서 태어난 시나위 명인 이충선李忠善의 율제篥制로 이충선은 박종기의 대금산조를 참고해 남도시나위 가락과 뻐꾸기, 소쩍새 등 각종 새소리의 봉장취 가락을 많이 삽입하여 대금산조를 만들었다. 초창기에는 대금산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좀 더 변화 있고 짜임새 있는 산조로 발전 되지는 않았으며 요즘에는 거의 연주가 되지 않아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피리 시나위 명인 이충선李忠善은 경기시나위 동령제東嶺制 창시자 방용현方龍鉉에게 23살 때 대금 삼현과 시나위를 배웠고, 양경원梁慶源에게 피리 삼현과 시나위를, 서울에 올라가 악사로 있으면서 정악악사 이재규에게 피리 줄풍류 전바탕을 배웠다. 이후 정악악사 민완식閔完植에게 양금 풍류 전바탕을, 지영희의 부인 성금연成錦鳶과 심상건沈相健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으며, 1973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피리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 평택호풍어제를 진행하는 무속인과 시나위 연주자들

이충선은 한주한의 대금산조를 인용하여 단국대 명예교수인 서한범에게 피리로 가르쳤는데 서한범이 악보로 정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이충선의 경기시나위 광주제는 그의 스승인 평택 출신 방용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이충선의 광주제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서 전승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의 4대 시나위인 동령제, 안산제, 남양제, 광주제는 평택의 전통예인들에 의해 창시되거나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은 주요 전승자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령제를 창시한 방용현은 안산제의 지영희와 광주제의 이충선을 학습시켰으며, 그의 손자인 남양제 방돌근은 어려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방용현 이야말로 4대 경기시나위 육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전통음악계의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경기시나위 안산제는 지영희가, 남양제는 방돌근이 중심이 돼 고유한 특성을 지닌 제制를 형성함에 따라 오늘에까지 이어져 많은 국악인들이 즐겨 연주하거나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이처럼 한강이남지역을 대표하는 경기도당굿 음악인 경기시나위를 평택의 연주자들이 주도해왔다는 것은 평택의 지리적 특성인 산과 평야, 강과 바다를 배경으로 역사 문화적 토양이 조화를 이루며, 민초의 질박한 삶이 대대손손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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