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노동자에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복직과 같은 소식이
전해지길 바란다

 

▲ 남정수 전 대변인
민주노총

2018년 12월 31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71명이 공장으로 출근했다. 그들의 손에는 카네이션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2009년 5월 8일 어버이날, 그들의 손에는 쥐어진 것은 카네이션이 아니라 집으로 날아온 해고통지서였다. 10년 만의 출근길에 받은 카네이션 한 송이는 바로 그날 받지 못한 카네이션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될 만큼 오랜 시간이었다. 30여 명의 죽음을 불러온 참혹한 시간이기도 했다.

2009년 2646명이라는 대규모 구조조정은 평택지역사회와 지역경제에도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긴 말 그대로 ‘사태’였다. 이 ‘사태’의 실타래를 푸는 해고자 복직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2015년 말 해고자 복직을 위한 노·노·사 합의가 있었지만, 부분 복직 외에는 이행되지 않았다. 희망이 희망 고문이 된 것이다. 이번 복직은 지난해 9월 이른바 노·노·사·정 합의에 따른 것이다. 이 합의에 의하면 71명 외에 남은 48명도 2019년 상반기까지 복직하기로 했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이제 막 햇빛을 본 느낌이다.

쌍용차 정리해고가 남긴 사회적 상흔은 비단 정리해고뿐만 아니다. 상하이 자본의 먹튀와 이명박 정권의 국가폭력, 기획된 민주노조 파괴, 정리해고의 ‘불법’을 ‘정당’으로 뒤바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거래와 같은 진상과 진실은 복직과 별개로 여전히 덮여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봉합도 방법이지만 때로는 곪은 곳을 도려내야 할 때도 있다. 쌍용차가 그런 경우다. 복직 합의와 그 이행 과정이 여전히 남겨진 과제를 덮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돌아보면 지난 10여 년간 쌍용차 문제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정치적 과제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연대’의 지속과 확장이었다.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 한국 시민사회가 이토록 함께 아파하고, 연대하고 마음과 힘을 모았던 사례는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선 77일간의 극한적인 투쟁, 그리고 이어진 억울하고 비통한 노동자들의 죽음이 사회적 연대의 원초였겠지만,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싸웠던 ‘노동조합’을 지금까지 지켜오지 않았다면 단연코 이 같은 사회적 연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군가 이야기한다. 쌍용차 노동자들만 억울한 게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들은 부지기수로 해고되고 억울하게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와 생존은 자본의 선처와 선의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에 포기하는 것이 당연해서는 안 된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은 노동자들에 ‘노동조합’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이 노동자들의 권리와 생존권 보장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통의 상식’이 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의미 있는 사례가 돼야 한다. 이번 합의와 복직이 쌍용차의 어두웠던 시간을 끝내는 마침표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2019년 상반기까지 남은 복직대상자의 복직이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노·노·사·정 합의에는 해고자 복직과 함께 정부의 약속도 있다. 어김없이 이행돼야 한다. 사실 복직은 원상회복이 아니다. 원상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고 찢겼다. 어린 시절 아빠가 일터에서 쫓겨난 10년 세월을 함께 겪고 보냈을 아이들의 상처가 원상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12월 31일 출근길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기쁘고 홀가분했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잘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기에 그렇다.

지금도 노사 합의를 지키지 않는 악질 자본에 맞서 75m 굴뚝 위에서 425일을 살아내는 것도 모자라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외주화와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청년 노동자들이 죽음과 맞닿는 현실도 반복되고 있다. 이 모든 노동자에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복직과 같은 소식이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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