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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평택의 전통예인-12
박성복 기자  |  sbbar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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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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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지영희는 세습무가에서 출생
경기시나위 명인으로
해금·피리 등 기악가 이면서
편곡·지휘·무용 등 국악 대가다

 

지영희池瑛熙, 창작분야 작곡 1세대로 국악 전반 능력의 소유자
시나위 안산제安山制, 지영희의 율제篥制로 섬세하고 굴곡이 커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조직, 제1대 악장·상임지휘자 활동

 

   
▲ 지영희(池瑛熙) 시나위 예능보유자




Ⅲ. 평택의 예인藝人
2. 기악

3) 평택의 기악器樂 명인名人

 

■ 지영희池瑛熙 ①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였던 지영희는 1909년 9월 27일 포승읍 내기리에서 아버지 지용득池龍得과 어머니 김기덕金基德 사이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지천만地千萬이었지만 마을에서는 어려서부터 지한식地漢植으로 불렀고, 영희는 그의 아호雅號이다.

지영희가 11살 되던 해인 1918년 그의 가족은 포승읍 내기리 안터에서 이웃 마을인 만호리 원터로 이사하였다. 포승읍 내기리와 만호리는 경기만에 가까이 있어 무속신앙이 발달했고 충청도 내포지방의 소장수들과 곡물을 실은 배와 어선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지영희 가문은 포승읍 일대에서 무업巫業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지문일가地門一家의 세습무世襲巫 전통은 할머니 전석준에서 어머니 김기덕, 작은어머니와 여동생 지옥희로 이어졌다. 지영희의 스승이었던 지용구와 음악적 스승이자 동지였던 지갑성, 경기민요 명창 지연화도 지문일가地門一家의 명인들이다.

   
▲ 지영희가 태어난 포승읍 내기리 안터마을(왼쪽 중간)

어린 지영희는 한문과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가문 대대로 이어오는 무속음악을 자연스럽게 내려 받았다. 11세에 만호리로 이주한 뒤로는 경기도당굿의 명인들로부터 다양한 기예를 익혔다. 지영희에게 처음 기예를 가르친 인물은 이석은이다. 지영희는 11살의 나이에 이석은에게 승무, 검무, 굿거리를 배웠다. 22세에는 조항련에게 호적을 배웠고, 23세에는 정태신에게 양금을 배웠다. 또 24세에는 지용구에게 해금을 배우고, 양경원에게는 피리를 배웠다.
 

그 뒤에도 김계선에게 풍류대금을, 평택 이충동 출신으로 경기시나위 동령제 창시자인 방용현에게 민간풍류대금을, 최군선에게는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장고 12채를, 박춘재에게는 경기서도민요를 배우는 등 배움의 열정을 이어갔다. 지영희의 배움의 열정은 민속과 무속을 아우르는 폭넓은 이해를 갖게 하였다. 그의 뛰어난 연주실력도 배움의 열정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경지였다.

지영희는 우리 국악뿐만 아니라 창작분야의 작곡에서도 1세대에 해당하는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갖춰나갔다. 지영희는 ‘종합예술인’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해금과 피리를 비롯해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이 모두 다루었고, 관현악 편곡과 지휘, 무용까지 모든 예술분야를 겸비했다. 이처럼 모든 장르의 예술분야를 섭렵한 예술가는 다시 탄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지영희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14살 때부터 몇 차례 가출하였다. 가출 후 그는 굿판에서 악사를 했고 벌어들인 돈은 꼬박 모아두었다가 몇 년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영희는 집안 형편이 안정되자 새로운 음악의 도전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배움을 통해 얻어진 지영희의 출중한 기예는 각 마을 두레패에서 영입 경쟁이 벌어져 마을사람들이 지영희의 집으로 와서 농사일을 대신 해주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구애求愛를 보냈다.

하지만 지영희는 고향에서만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부모가 그랬듯 평생 천대받는 무속인으로 살기보다 인정받는 음악가이기를 원해 1937년 서울로 올라와 당대 최고의 고수이며 무용가였던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 들어가 한성준과 최승희무용단의 악사로 활동하며 민속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국악 위기 극복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무속의 반주악기로만 머물렀던 해금과 피리를 독주악기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이 시기 조선음악무용연구소의 한성준 음악무용단원으로 일본에 가서 음악무용 발표공연을 하고 음반을 취입했으며, 최승희무용단에서 관악무용곡을 편곡해 국내외 순회공연에서 연주하며 각 지방의 민속음악과 중국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지영희의 음악세계를 넓히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지영희는 1945년 평생 음악적 동반자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였던 성금연과 혼인을 한다. 성금연은 가야금산조의 창작과 판소리, 가야금 병창, 아쟁, 해금, 단소 등 다양한 연주에서 능했던 명인으로 당대 최고 명인들끼리의 결합은 음악적으로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발휘했다. 두 사람의 삶은 연주를 할 때나 작곡을 할 때도 서로 들어주고 의견을 주고받는 상호적 관계였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위기를 맞은 우리 국악계는 국악을 재건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해방직후 지영희가 국악건설본부 창설에 참여하고 대한국악원 창립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서구문화가 밀려오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어 국악재건을 하기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지영희는 1946년 민요 60곡을 레코드 취입하였고 서울방송국 전속국악사로도 활동하였다. 1947년에는 대한국악원에서 주최했던 국극 선화공주 공연에 12인조 악단을 조직하여 서양 오페라처럼 무대 전면에 세운 뒤 처음으로 지휘하면서 국악관현악단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1948년에는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1953년 대한국악원 산하에 ‘지영희고전음악연구소’를 설립하여 기악과 고전무용을 가르치는 등 국악의 재건과 국악현대화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지영희가 가장 잘 다룬 악기는 해금과 피리다. 하지만 태평소나 장구에도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지영희류 해금연주는 무속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금산조에서 장단 사이로 드나드는 가락의 놀음새와 잉어질의 코믹한 연주법은 지영희류 해금연주의 특징이다. 다른 연주자들과 달리 무용반주, 민요반주, 기악합주, 독주와 같이 모든 분야에 해금연주를 하였던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영희는 피리연주에서 더름치기, 혀치기, 목튀김 같은 특수주법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연주는 가락구성도 다양하고 섬세하여 무용가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그 바탕에는 지영희 스스로 무용을 학습해 무용가들의 마음을 잘 읽어 연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경기시나위 안산제安山制는 지영희池瑛熙의 율제篥制로 해금산조는 대금산조의 선율을 많이 본받았고 섬세하고 굴곡이 많다. 경기도 민요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 중중머리 부분에서는 장단 사이로 드나드는 가락의 놀음새와 잉어질의 익살스러운 연주법이 특색 있다. 피리 연주는 더름치기, 혀치기, 목튀김 같은 특수주법을 구사한다.

지영희의 음악세계는 전통의 충실한 계승에만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전통을 계승하고 재창조하는 데 있었다. 지영희는 그동안 반주악기로만 머물었던 해금, 피리, 태평소와 같은 악기를 독주악기로 발전시켰다. 악기로 독주를 하려면 그에 맞는 음악이 필요했다. 지영희류의 해금산조, 피리산조, 시나위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특히 즉흥성이 강조되는 경기시나위는 지영희에게서 크게 발전하였다.

지영희의 국악현대화 작업은 민속음악, 무속음악의 채보, 작곡, 교육, 관현악연주로 이어졌다. 그동안 민속음악, 무속음악은 구음으로 전해졌을 뿐 오선보에 기록되지 못했다. 위기상황에서 오선보에 기록되지 않고 대중의 외면을 받는 음악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미신타파를 외치면서 국악의 뿌리였던 무속음악, 민속음악은 미신의 범주에 들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지영희는 국악교육과 연주를 위해서도 가락을 오선보에 기록하고 편곡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보활동에 온힘을 쏟았다. 

   
▲ 지영희가 채보한 무속장단 육필 악보

지영희는 굿 음악을 중심으로 채보를 많이 했지만 민요도 빠트리지 않았다. 각 도별 민요는 물론 특히 호남지방 민요 채보와 편곡을 했고 이때 단거리 이동 수단은 자전거였다. 그는 작곡을 배우기 위해 ‘가고파’를 작곡한 서양음악 작곡가 김동진과 작곡가 김희조를 모셔다 부인 성금연과 함께 작곡 개인레슨을 받기도 했다.

지영희가 공을 들인 국악 채보와 작곡은 기존의 장르와 전혀 새로운 방식의 국악관현악단으로 승화됐다. 국악기로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다양한 서양음악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국악관현악단이었다. 지영희는 1947년 국극 ‘선화공주’를 공연할 때 12인조 악단을 무대 전면에 내세워 연주했으며, 1962년 ‘악성추모제’에 국악예술학교 50여 명의 학생들로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초연初演하였다. 관현악단이 처음으로 연주한 ‘청하지곡’은 그의 창작 관현악곡이었다.

관현악에서 국악기가 낼 수 없는 베이스음을 얻기 위해 악기개량도 시도하였다. 지금도 국악 현장에서 사용하는 공후, 비파, 대해금 같은 다양한 악기들은 지영희의 피나는 고뇌와 노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관현악단은 기존의 국악기로는 음역을 폭넓게 소화해낼 수 없기 때문에 지영희는 악기 개량 작업을 시작했다. 국악예술학교 한편에 악기제작소를 만들고 악기제작자를 상주시켜 새롭게 연구한 악기 도면을 내밀며 국악기 제작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비파나 공후 같은 고대악기들을 개량해서 기존 국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역대를 표현해 내곤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악관현악단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세계민속예술제’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큰 호응을 얻었다. 1963년에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창작곡 ‘신아위’를 지휘하였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모태로 1965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한 지영희는 제1대 악장에 취임하였고, 이듬해부터는 상임지휘자로 활동하였다.
 

   
▲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지휘하는 지영희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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