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지영희는 시나위 명인이며
한국음악 중흥의 도화선이 된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주역으로
한국음악을 꽃피우게 한 인물이다

 

지영희池瑛熙, 음반 녹음과 방송 활동, 영화음악 작업에도 참여
1960년 개교한 국악예술학교는 지영희·박헌봉 등의 큰 업적
전통의 본질을 지키면서 국악을 현대화한 것은 지영희의 위대성

 

▲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지휘하고 있는 지영희(池瑛熙)




Ⅲ. 평택의 예인藝人
2. 기악

3) 평택의 기악器樂 명인名人

 

■ 지영희池瑛熙 ②

지영희의 국악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음반작업과 방송활동 그리고 영화음악 작업이다. 지영희가 처음으로 음반을 취입한 것은 서울로 상경하던 1937년 빅터레코드사의 민요와 대풍류다. 그 뒤로 한성준 조선음악무용연구소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빅터레코드를 취입하고 국악방송을 했으며, 해방 후 고려레코드사에서 민요 60여곡을 녹음했다. 1947년에는 서울방송국의 전속국악사로 활동했으며, 6.25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서울 중앙방송국 국악전속 민요연구회에 입회했다. 1956년에는 서양악기로 국악민요를 연주해 80여곡을 녹음했으며, 킹스타 레코드사에서 고전음악 100곡을 취입해 해외 판매를 시도했다.

▲ 해금을 연주하고 있는 지영희

2003년 발매한 <해금시나위와 산조>에는 해금 시나위 명인 지영희와 해금 산조 명인 한범수가 대금산조 등의 여타 산조 가락을 이용해 구성한 해금산조를 실어 우리나라 해금산조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했다. 특히 가슴을 저리게 하는 해금의 음색이 경기남부와 남도지역에서 전승되는 육자배기조 선율의 슬픈 느낌을 더해 준다. 해금으로 연주하는 시나위는 주로 경기와 남도지역의 무속음악에서 사용하는 반주음악으로 도살풀이, 모리, 살풀이 등의 장단에 맞추어 연주한다.

이 음반에는 지영희가 연주한 시나위-무장단의 즉흥연주, 시나위-도살풀이, 시나위-모리, 시나위-살풀이, 산조-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와 한범수가 연주한 산조-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가 수록돼 있다.

▲ 부부 국악인 지영희 성금연 연주 음반

지영희는 1950~1960년대에 영화음악에도 참여해 신상옥 감독의 사극영화 대부분의 배경음악을 맡았다. 그 가운데 ‘벙어리 삼룡’, ‘월하의 공동묘지’, ‘장희빈’은 지영희가 배경음악을 녹음한 대표적인 영화다.

무속음악인으로 천대받던 자신처럼 우리의 전통음악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영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국악교육이었다. 1960년에 개교한 국악예술학교는 박헌봉, 박귀희,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국악인들과 뜻을 같이해 설립했으며, 지영희는 실기지도를 책임지는 예술부장으로 월급도 없이 가난한 학생들을 불러 모아 국악을 가르쳤다.

지영희의 교수법은 기본을 매우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피리연주에서도 반드시 폐활량 키우기 훈련을 먼저 한 뒤에 연주법을 익히도록 했는데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좀 더 성숙된 연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중·고등학교에서만 국악을 전공할 것이 아니라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졸업한 후 교수나 전문연주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수많은 전문연주자와 국악교육자를 배출했다. 지영희류 피리 산조를 계승한 최경만, 박범훈, 이종대, 박승률, 김광복, 송선원, 한상일, 김재영, 해금을 계승한 김영재, 최태현, 김무경, 신상철, 박정실, 홍옥미, 백정순, 대금의 이철주, 김방현, 최상화, 장구와 피리의 장덕화,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남기문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국내 많은 대학과 국악단 등에서 후학을 육성함은 물론 연주에서도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국악예술학교 교사 재직 당시 지영희는 “가락은 몸으로 전수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자신의 육성과 가락을 테이프에 녹음해 제자들에게 전수한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유일무이한 일대 사건이었다.

민속 기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산조는 작곡자와 연주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에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해 가락을 짠 뒤 본인의 이름을 붙여 연주했다. 지영희는 자신만의 연주 세계를 구축해 지금도 많은 후배 국악인들이 그의 산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연주하지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여러 악기에 두루 능통했던 지영희의 신명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삶의 자취는 ‘지영희류 해금산조’와 ‘경기 대풍류’ 등의 진수를 만들어 냈다.

해금산조는 20세기 초반에 지용구 해금 명인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후에 지영희, 한범수 명인 등이 해금산조의 골격을 완성했다. 현재 많은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고 있는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대금산조의 선율을 많이 본받았고, 섬세하고 굴곡이 많으며 경기도 민요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 중중머리 부분에서는 익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한범수류는 부드럽고 유연한 진행을 보이며, 가야금 선율을 많이 인용했다.

‘대풍류’라고 많이 알려진 관악기 중심의 멋스러운 합주곡인 ‘경기 대풍류’는 서울, 경기지역의 민간 음악인들이 전승해 온 합주곡으로, 염불(느린염불-반염불), 타령(허튼타령-중허튼타령-자진허튼타령), 굿거리(굿거리, 자진굿거리), 당악 등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현재 국립국악원 등에서 연주하는 대풍류는 1960년대 지영희 명인이 구성해 전한 것이다.

지영희는 1972년 성금연, 김소희, 김윤덕과 함께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영예를 얻었고, 1973년 시나위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에 지정됐다. 하지만 지영희는 당시 국내에서 벌어진 국악계의 갈등 상황과 모든 국악의 뿌리였던 민속음악에 대한 천대 등을 이기지 못하고,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라는 명예를 뒤로 한 채 1974년 부인 성금연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의 길을 택한다. 이민 후에도 오로지 국악 발전에 몰두해 오던 지영희는 하와이대학 강연과 국내에 있는 제자들에게 악보와 연주 테이프를 보내는 일을 해왔다. 지영희와 성금연의 폭넓고 해박한 음악지식과 뛰어난 연주 실력,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하와이 이민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우리 국악계의 큰 손실이었다.

▲ 시나위 예능보유자 지영희와 그의 부인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성금연

하와이 이민시절에도 지영희는 국악의 장래를 염려해 고국에 있는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해주기 위해 힘을 쏟아 부었다. 이때 장구로 사라져가는 진세 외 16장단을 녹음해 제자들에게 건네줘 사물놀이 창시자인 김덕수, 최종실 등이 그 녹음테이프를 듣고 학습할 수 있도록 했다. 지영희는 제자들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장단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곁들여 진세장단과 올림채장단 등을 녹음하며 그가 알고 기억하는 것을 모두 쏟아냈다. 하와이에 이주해 제자들을 위해 녹음이라도 남기고 죽어야 된다는 심정으로 녹음에 임해 지금 그 가락이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게 됐다.

해외에서의 활동과 제자 육성에 끈을 놓지 않았던 지영희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뒤로한 채 1980년 2월 2일 73세의 나이로 이국 땅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 지영희는 한국음악의 예인藝人 중에 예인으로 연주, 교육, 지휘, 춤, 영화음악, 악기개량, 국악관현악단 결성, 국악 현대화 등 민속음악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겨 현대 국악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지영희의 위대성은 전통이 갖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지키면서 우리 국악을 현대화 했다는 것이다. 서양의 오선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필요성을 일찌감치 알아 몸소 배운 후 가르쳤으며, 이제는 우리 국악을 학문화하고 이론화해야 된다는 것을 인식해 스스로 실천해 나간 국악계의 혁명가였다.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자칫 굿판을 맴돌 뻔한 그가 상상할 수 없는 노력 끝에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 명인으로, 한국음악 중흥의 도화선이 된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주역으로 현재와 같이 한국음악을 꽃피우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지영희만의 안목지眼目知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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