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은 추운 계절에 핀다고 동백(冬柏)이다. 삼동을 견디고 피는 동백꽃은 동백화라고도 하고 산다화라고도 한다. 한반도 서남지방의 끝자락 해남의 미황사(美黃寺)에는 오래된 동백나무들이 있고 그 동백나무에서 피는 동백꽃은 선홍색이다. 늦가을 산수유나무 가지에 달리는 산수유 열매도 새빨갛다. 한겨울 눈에 파묻힌 산수유나무 빨간 열매는 꽃보다 더 예쁘다. 피, 장미꽃, 자두, 토마토, 불꽃, 포도주, 큰 소쩍새의 홍채 들은 다 붉다.
빨강은 색채의 위상학에서 무지개의 첫 번째 색으로 뚜렷하다. 영국의 낭만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을 뛰노니”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무지개는 여기 아닌 저기, 오늘이 아닌 내일로 연결하는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넌다면 희망, 이상향, 행복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무지개를 붙잡을 수 있는가? 무지개는 아무도 붙잡을 수 없기에 모두의 꿈이다. 어른이 된 나는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두근댄다. 무엇보다도 빨강은 해의 색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붉은 해야 솟아라.”(박두진) 해는 어둠을 뚫고 솟는다. 새해 첫날 누리에 햇빛이 골고루 내린다.
황새도, 거북도, 달팽이도, 굼벵이도, 바위도 누리에 균등하게 비치는 그 빛을 받는다.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벵이는 굴렀는데/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반칠환, ‘새해 첫기적’). 새해 아침에 떠오르는 해는 누리에 새 날, 새 기운을 펼친다. 해는 누리를 밝고 따뜻하게 덥히고 씨앗들을 움트게 한다. 해의 붉음은 온갖 사물 속으로 흐르고 스미며 배어들어 생명을 살찌게 한다.
해가 없었다면 지구는 얼음구덩이, 암흑 세상이 되었을 테다. 생명 세상의 융융한 번창은 전적으로 높이 떠서 누리에 고루 빛을 뿌리는 해의 덕이다. 붉음에서 연상되는 것들은 열정, 충동, 감정, 사랑, 생명, 전쟁, 에너지, 축제, 활력, 힘, 젊음, 즐거움이다. 무엇보다도 빨강은 생명의 원점이다. 생명은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절대 가치에 속한다. 그래서 빨강은 고귀하다. 빨강은 이성을 압도하는 본성의 색깔이다. 열정과 희열은 검정도 아니요 노랑도 아닌 빨강을 타고 온다. 빨강은 사랑과 열정의 신호색이다. 빨강은 자주 젊은 남녀를 성적으로 흥분시킨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없었다면 나도 당신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빨강은 모든 존재의 가능성을 품고 세상에 작열한다. 빨강은 생명들의 태초, 사랑의 신호, 꿈의 표지다. 그래서 빨강은 숭고하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1915~2000), ‘선운사 동구’

동백꽃은 선홍색으로 피고 질 때는 모가지 째 떨어져 뚝뚝 진다. 그 낙화가 자못 처절하다. 그 처절함이 연상되어서 병문안 갈 때 들고 가는 꽃으로 동백꽃은 삼간다. 시인은 선운사(禪雲寺)로 동백꽃을 보러 갔나보다. 선운사는 시인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절이다. 계절이 일러 동백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시인은 절 아래 주막에 주저앉아 하릴없이 막걸리나 마셨다. 넉살이 좋은 주모는 막걸리만 판 게 아니라 손님에게 제 육자배기 가락도 들려주었다. 목이 쉬어서 카랑카랑 쇳소리가 나는 육자배기 가락은 애살스러우면서도 청승맞다.
사람의 눈이 빛, 색, 선으로 이루어진 화상(畵像)을 읽어내는 장치가 아니듯 귀 역시 소리의 수신기만은 아니다. 귀는 소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와 몸을 섞고 일체를 이룬다. 그리하여 어떤 소리는 귀청에 가 닿는 게 아니라 마음의 애잔한 부분에 가 닿아 녹아내린다. 낮술에 취해 듣는 그 가락의 청승맞음은 이 세상의 모든 굳센 것들의 마음을 녹인다. 아마도 붉게 핀 동백꽃을 보러 왔다가 동백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시인의 마음도 녹였으리라. 이 시를 읊조려보면 어느덧 주막 여자의 신산스런 막살이의 외피에 더께로 앉은 시름이 육자배기 가락으로 녹아 가만히 흘러나온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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