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후손이
‘평택지역에 산다’는 것과
위대한 선조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다

 

   
▲ 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사람은 평화로울 때보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진면목이 나타난다. 평화로운 시기에 폼 잡고 말로 한 몫 보는 것쯤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민족과 사회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는 이타적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결하고 값지다.

우리 민족은 지난 100년 동안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다. 과거 2000년의 변화보다 지난 100년간의 변화가 훨씬 컸다. 굴곡이 많은 역사이다 보니 결단을 요구당할 때도 많았다.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곤란하기도 했으며 가족과 일신의 안위가 걱정돼 비겁한 선택을 할 때도 많았다. 할 말이 많은 세월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삶은 냉엄한 역사적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는 구구절절한 사정이나 청탁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얻어진 결론과 교훈을 우리는 ‘역사歷史’라고 말한다.

‘독립운동’은 근대 100년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 일제강점기는 참 헛갈렸던 기간이었다. 대한제국은 우리 민족에게 애국심이나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하지 못했고, 민중에게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권 의식도 갖게 하지 않았다. 그저 민중은 지배와 수탈의 대상이었고 지배층이 판단한 것을 무조건 따르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무지렁이들이었다. 하지만 국권 피탈의 위기가 닥쳤을 때 분연히 일어선 것은 민중이었다. 권력과 재물, 학문과 사상을 독점하며 호령하던 지배층이 나라를 팔아먹고 도망칠 때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 걸고 달려들었던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의병이고, 동학농민군이고, 독립군이다.

평택지역 3.1운동은 대표적인 민중운동이다. 초기에 천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했지만 봉기를 주도하고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은 대부분은 유명하지도, 많이 배우지도 못했던 시골 무지렁이들이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이 단합해 만세를 부르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에 격동돼 목숨을 내놓았다. 3.1운동은 청년, 지식인, 일반 대중을 각성시켜 1920년대와 30년대 다양한 사회운동을 발전시켰다. 민족의 역량을 키우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힘을 보탰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임시정부 중심의 외교 독립운동에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도 존재했다. 이상사회를 꿈꾸며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인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결코 개인의 안위와 이익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출세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한 알의 씨앗이 돼 죽어 썩어지면 민족이 독립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이상理想’을 붙들고 자신을 희생했던 분들이다.

평택지역에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가 많다. 일부는 수면 위에 드러나 표창도 받고 선양됐지만, 상당수는 이름이나 행적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분단 상황에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양되지 못한 인사도 많다. 평택시에서는 올해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들을 발굴하고 선양하려 노력하고 있다. 필자는 평택시의 노력을 환영한다. 하지만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다. 3.1운동 선양사업이 특정 지역 중심에서 벗어나 평택지역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 점도 아쉽고, 평택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사료 조사와 학문연구, 지표조사를 좀 더 자세히 해서 객관적인 내용을 담보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여전하다. 3.1운동 관련 인물뿐만 아니라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이들의 유허에 표석이라도 세우는 노력도 기대한다. 이념적 굴레에서 벗어나 아니키스트나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아우르는 선양사업도 필요하다. 그래서 ‘평택지역 역사’를 배우는 우리의 후손이 ‘평택지역에 산다’는 것, 위대한 선조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다. 외국이나 다른 지역 인사가 평택에 방문했을 때 지나는 곳곳마다 자랑스러운 평택의 역사를 만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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