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조선후기 5대 남사당패였던
남사당진위패男寺黨振威牌는
1867년 경복궁 중건 위안잔치에서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를 받았다

 

사당패 연희,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 여섯 마당 구성
조선후기 유준홍이 주도한 ‘남사당진위패’는 전국적 명성 얻어
평택농악 출신 송창선·최은창·이돌천·김용래 남사당패로 활동

 

▲ 조선풍속 남사당 놀이패(박성복 소장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Ⅲ. 평택의 예인藝人
3. 농악

■ 사당패寺黨牌의 유래와 평택지역 남사당男寺黨

남사당男寺黨놀이는 조선후기부터 1930년대까지 행했던 놀이로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비롯해 40~60여명의 남성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농어촌을 돌며,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연행한 놀이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사회에서 자연 발생한 민중놀이지만 양반들로부터 박대를 당해 마을에서 공연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화주, 놀이를 관장하는 뜬쇠, 연희자인 가열, 새내기인 삐리, 나이든 저승패와 등짐꾼 등으로 이루어진다. 남사당놀이는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풍물’은 농악놀이로 공연 시작을 알리면서 구경꾼을 유도하기 위한 놀이이며, 남사당패가 연행하는 풍물은 평택농악 가락인 웃다리농악을 바탕으로 한다.

‘버나’는 접시돌리기와 비슷하게 쳇바퀴나 대접 등을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이다.

‘살판’은 오늘날의 텀블링과 같은 땅재주로,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남사당 진위패의 본거지였던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전경)

‘어름’은 줄타기 곡예를 이르는 말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만큼 어렵다 하여 남사당패 내에서만 쓰이던 말이었으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덧뵈기’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탈놀이이다. 특히 덧뵈기는 경기도 평택과 안성지역이 전국적 조직의 구심이 되어 충청도 회덕과 당진, 경상도 진주 등 전국 각지에서 보이는 ‘사당골’과 ‘불당골’이라는 명칭의 마을에 산재했던 ‘사당’과 ‘남사당패’들이 연희한 탈놀이의 이름이다.

인형극을 이르는 ‘덜미’는 인형극에 나오는 중요 등장 인물에 따라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부른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인형극은 남사당놀이밖에 없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은 보통 7~8시간가량 소요돼 저녁밥을 먹은 후 시작하면 새벽 넘어 까지 연행이 이어진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층에서 발생하여 서민들을 위해 공연된 놀이로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한과 양반사회의 부도덕성을 놀이를 통해 비판하며 풀고,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 걸립에 나선 사당패

 

조선후기 5대 남사당패의 하나였던 남사당진위패男寺黨振威牌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조선 고종 4년(1867년)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기념해 건축에 참여했던 석공과 목수 등 기술자들을 불러 위안잔치를 펼쳤는데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를 무렵 ‘남사당진위패男寺黨振威牌’ 공연이 시작됐다. 왕의 초청을 받은 일꾼들은 푸진 음식과 흥겨운 음악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되고 남사당진위패 공연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이날 경북궁 건축 위안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흥선대원군은 흥을 한껏 돋워 분위기를 최고조로 올린 남사당진위패를 불러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都大房旗’라는 농기와 3색 어깨띠를 하사하고 상쇠 김덕일에게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내렸다.

조선 후기 전국의 사당패 중에서도 평택 진위지방을 중심으로 유준홍이 주도한 ‘남사당진위패男寺黨振威牌’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으며, 이를 계기로 평택지역에 농악도 발달할 수 있었다. 과거 전국 5대 사당패의 하나였던 평택 진위패의 파일난장굿은 그 규모가 인근에서 볼 수 없는 최대였다고 전해진다.

평택농악의 계보를 이야기 하자면 진위현 봉남리 유준홍과 그의 아들 유세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준홍은 1860년대 이전부터 남사당을 키워왔으며, 그의 아들 유세기는 1984년 당시 91세의 나이에도 전국 5대 놀이패인 진위패를 육성했고 농악과 시조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시조 창법》이 있고, 작고할 때까지 평택군 진위면 봉남리에 거주했다.

1930년대까지 활동했던 남사당패는 심선옥패와 오명선패, 안성복만이패, 원윤덕패, 이원보패 등이 있다.

▲ 민속극회 남사당 초창기 참가 예인 명단(기록영화 중 일부)

 

‘심선옥패沈善玉牌’는 남사당진위패를 이어받은 패거리로 주로 평택과 화성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을 순회하며 활동했다. 주요 연행자는 김문학, 양도일, 송순갑 등이다.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였던 이돌천은 1945년, 평택농악 예능보유자 김용래는 1950년 송순갑의 요청으로 이 행중에 참여했다.

‘오명선패吳明善牌’는 꼭두각시놀음의 우두머리로 대잽이였던 남운용南雲龍과 호적수號笛手였던 정일파가 이 패거리 출신이며,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였던 최은창도 남운용 행중에서 부쇠로 활동했다.

‘안성복만이패’는 안성 개나리패를 이어받은 패거리로 꼭두쇠 김복만이 이끌어 오면서 주로 경기도 이북지방에서 활동했다. 전근배, 최성구, 박종휘, 정일파, 양도일, 남운용이 이 행중의 일원이었다.

‘원윤덕이패’는 안성복만이패를 이어받은 패거리로 1939년 만주 북간도北間島까지 가서 활약했으며, 그곳에서 해산됐다가 광복 후 다시 조직됐다. 단원은 평택출신으로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였던 최은창과 남사당놀이 예능보유자였던 송창선 그리고 지수문, 송철수 등이었다.

‘이원보패’는 주로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에서 활약한 패거리로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였던 최은창이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년간 활동했다. 또 평택농악 예능보유자였던 이돌천도 1937년 이 행중에 참여했다.

1960년 ‘민속극회 남사당’을 창립할 때 평택출신으로는 송창선, 최은창, 이돌천이 참여했으며, 이후 1970년 김용래가 남사당에 합류했다. 당시 송창선은 호적과 덧뵈기로, 최은창은 장구와 덧뵈기로, 이돌천과 김용래는 법고로 활약했다.

▲ 1960년대 진위면 봉남리 전경

이후 송창선은 1964년 12월 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호적부문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남사당의 일원으로 활동을 지속했지만 최은창과 이돌천은 1985년 12월 1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상쇠부문과 상법고부문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남사당을 탈퇴했다. 김용래는 2000년 8월 22일 평택농악 상쇠와 무동놀이, 법고부문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남사당을 탈퇴한 후 평택농악 전승에 전념했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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