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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100년의 함성과 만석꾼의 꿈을 찾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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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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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 이석영·이회영 집안의 뿌리는 평택


진위면 동천리·가곡리·봉남리·마산리 경주 이씨 묘역 분포
이항복 후손, 조선 후기 영의정·좌의정·대제학 다수 배출
경주 이씨 백사공파 후손들 조선 후기 정치·사상계 주도
‘무신 난’의 위기 상황에서도 ‘삼한갑족’의 위상 지켜내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입향조는 진위면 봉남리 이세필
이세필 세 아들 태좌·정좌·형좌 현달, 외손 박문수 유명

 

   
② 경주 이씨,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우뚝 서다
 
   
▲ 평택시 진위면 동천1리 ‘경주이씨 상서공파 세장지’와 재실 동천재

 

■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높임 받아
평택시 진위면 동천1리 마을 입구에는 ‘경주이씨 상서공파 세장지’가 있다. 세장지 위쪽에는 상서공파의 파조 이과의 제단과 후손들의 묘역이 있고 서쪽에는 재실 동천재가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봉산 서쪽마을 진위면 가곡1리 가오실 입구에도 ‘경주 이씨 천阡’이라고 새긴 표석이 있었다. 도로확장으로 길가에 어지러이 서 있던 표석은 최근 후손에 의해 진위면 봉남3리 이세필의 묘 아래로 옮겨졌지만 과거 이곳이 경주 이씨의 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진위면 봉남3리에는 구천 이세필의 묘와 후손들의 묘역들이 분포돼 있다. 진위면 마산2리 수촌마을 묘역과 재실도 동천리나 봉남리 못지않다. 이들 묘역은 조선 중기 명재상 백사 이항복(1556~1618)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은 조선 선조 때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적 재능과 기지機智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났고, 왜란이 발생하자 변치 않는 충절과 뛰어난 기지로 선조 임금을 끝까지 호종했다. 전란 중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맡아 왜란극복의 일등공신이 됐으며, 왜란이 끝난 뒤에는 영의정에 올라 전후복구사업에 공헌했다. 왜란 뒤 변화된 국제정세 속에서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것도 그였다. 권세가였지만 권력으로 사취를 하지 않았고 올곧은 품성과 검박한 생활로 조선의 4대 명재상으로 꼽혔다. 백사의 올곧은 삶과 정신은 후손들의 귀감이며 자부심이었다. 후손들은 이항복을 거울삼아 몸가짐을 바로 했고 학문에 힘을 써 이름 있는 학자, 높은 뜻을 실천한 정승, 판서를 많이 배출했다.
이항복의 후손 가운데는 현달顯達한 인물이 많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수 십 명에 달하며 조선후기 정승 반열에 오른 인물만도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이나 된다(증직으로 정승에 오른 사람까지 11명).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였던 대제학도 2명이나 배출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정승에 오른 인물이 366명뿐이었으니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에는 ‘상신록相臣錄’이 있다. 조선시대 상신(재상) 10명 이상을 배출해야 작성할 수 있었다는 상신록은 가문의 영예다. 지난 2월 경기도 포천시 백사 이항복 묘역을 답사했을 때 후손 이한우 씨가 자랑스럽게 내보인 책도 ‘상신록’이었다.
백사는 율곡 이이의 가르침을 받았다. 붕당으로는 서인西人에 속했으나 후손들은 노소老小 분당 때 소론으로 분류됐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소론小論의 중심가문이었다. 경종과 영조 초 이항복의 현손 이광좌는 소론의 영수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거듭 세 번이나 오르며 무신 난을 진압해 분무원종공신 1등에 봉해졌다. 같은 시기 이태좌도 좌의정을 지냈고,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도 영의정에 올랐다. 이경일은 순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며 고종 때 이유원도 영의정을 지냈다. 귤산 이유원은 청나라와 외교에 능해 중국을 자주 오갔는데 이 과정에서 사무역私貿易으로 억만금의 재산을 축적했다. 이 때 얻은 재산으로 흥선대원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으며, 남양주 일대의 땅을 사들여 관직으로나 재산으로 조선 최고의 가문을 구축했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에는 장관급인 판서를 내리 8대에 걸쳐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또 반남박씨 등 유력한 명문거족들과 혼맥婚脈을 형성하여 세상에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했다.

   
▲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백사 이항복 사당과 신도비, 묘
   
▲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이유원의 묘(사진 아래)와 조부 이석규의 묘(위)


 
■ 경기도 진위현에 뿌리를 내려
진위면 동천리 경주 이씨 묘역 입구에는 경주 이씨 상서공파의 ‘유래비由來碑’가 있다. 유래비에 따르면 경주 이씨 상서공파 평택 입향조는 조선 초 전농시판관을 지낸 이승李昇이다. 이승은 대제학을 지낸 최양의 딸과 혼인했고, 세조의 장인 윤번과도 사돈 간이었다. 이승의 아들은 동천1리에 묘가 있는 공조참판 이연손이고 이연손의 아들은 승손이며 이승손의 아들은 참지중추부사를 지낸 숭수다. 이숭수의 아들로 안동판관을 지낸 이성무는 모두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셋째가 예신이다. 이예신은 경기도 포천에 世居地를 마련했다. 전해오기로는 포천의 곽 씨 댁에 훈장으로 갔다가 그곳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이예신의 슬하에는 몽윤과 몽량 두 아들이 있었다. 그 중 몽량의 넷째 아들이 백사 이항복이다.
후손들은 경주 이씨가 무봉산 일대에 세거할 수 있었던 것은 사패지賜牌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누가 받은 사패지였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제3공화국 시절 농림부 차관을 지낸 후손 이창우(평택시 송북동 동막 마을이 고향) 씨는 경주 이씨가 평택지역에 본격적으로 세거한 것은 동천리 경주 이씨 묘역 가장 아래쪽에 묘墓가 있는 이수종부터라고 했다. 이수종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풀려나 진위면 동천리에 낙향하면서 세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천지역의 후손 이한우 씨는 이승李昇이 입향한 뒤 계속 살아왔다고 주장하여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이 평택지역에 세거한 것은 이항복의 증손 구천 이세필부터다. 문경공 이세필(1642~1718)은 호조참판(실제로는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음)을 지낸 뒤 조상들의 묘가 있는 진위면 봉남리 향교말로 이거했다. 그의 아호가 ‘구천龜川’인 것도 진위향교 앞을 흘렀던 진위천의 지류 ‘구천’ 주변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세필은 학문에도 뛰어났지만 아들 농사를 잘 지었다. 그에게는 태좌, 정좌, 형좌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현달했고,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외손 박문수도 큰 영화를 누렸다.
큰아들 이태좌는 세거지를 진위면 봉남3리 아곡으로 옮겼고 작은 아들 정좌는 진위면 가곡1리에 터를 닦았다. 이태좌의 아호 ‘아곡’도 아곡마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영조 초 소론정권에서 좌의정을 지낸 이태좌는 6촌간인 영의정 이광좌와 함께 동천리 경주 이씨 묘역도 조성했다. 입향조인 이승과 그의 부인 전주 최씨의 묘비 후면에는 당시 묘역과 묘비를 건립한 이광좌, 이태좌의 이름이 새겨졌다.
진위면 봉남3리 아곡마을과 가곡1리 가오실(개실) 일대에 자리 잡은 백사공파의 후손들은 승승장구했다. 25세손 이항복부터 35세손 이건영,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급제자를 배출했고 가문의 배경과 출중한 능력으로 정승, 판서를 두루 거쳤다. 예컨대 좌의정의 지낸 충정공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은 영조 후반기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종성의 아들(양자) 이경륜은 관찰사, 아들 이정규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정규의 아들 이계선은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아들 이유승은 형조와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거쳐 교정청 당상과 종1품 우찬성에 올랐다. 이세필의 둘째 이정좌의 후손들도 이에 못지않다. 누대에 걸쳐 정승과 판서를 지냈으며 34세손 이유원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좌의정에 서임됐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있은 다음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백사의 후손들이 대표적인 경향사족으로 분류되고 서울 중구 저동에 저택을 마련해 세거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꾸준하고 활발한 관직진출 덕분이었을 것이다.
 

   
▲ 경주 이씨의 세거지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사진 좌측)와 봉남리(우측)

■ ‘무신 난’도 기세氣勢를 꺾지 못해
조선시대 양반사족들의 유허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문거족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우선 세거지에 고택과 선영, 장토가 있었다. 과거에 급제해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면 집을 또 마련해야만 했다. 유력 가문은 서울에서 멀지 않고 풍광이 수려한 곳에 별서(별장)를 두었다. 곳곳에 전장田莊이 마련되면 주변에 집을 지었고 이런 저런 이유로 근거지를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대에 걸친 관직진출로 경향사족의 입지를 굳힌 백사공파의 후손들도 점차 세거지가 분화되었다. 이예신의 장손들과 이항복의 후손들은 여전히 경기도 포천에 세거했지만 지손支孫인 이세필의 후손들은 평택시 진위면 일대에 세장지를 마련했다. 이태좌의 후손들은 경기도 장단에도 근거가 있었으며 묘역은 경기도 가평군 율길리에 두었다. 이정좌의 후손 이유원은 경기도 남양주 화도면 일대에 엄청난 규모의 전장田莊을 마련하고 천마산 아래 임하려(가곡리)에 별서를 마련했다. 근래 경주 이씨 가문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유원의 근거지를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로 비정하는 것도 그곳에 별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라는 후광과 출중한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던 백사공파의 행보에도 몇 차례 위기가 있었다. 가장 큰 위기는 뭐니 뭐니 해도 영조4년(1728년)에 발생한 ‘무신 난(이인좌의 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 난은 노론의 지지로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치적 위기를 느낀 소론 강경파(준소)와 남인, 북인 일부 세력이 힘을 모아 일으킨 전국적 모반사건이다. 반란세력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 독살사건에 연루됐다고 선전공세를 펼치며 영조와 노론을 제거한 뒤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위기상황에서 영조는 반란의 진압을 당시 정권을 주도했던 소론 온건파에게 맡겼다. 영조 초 소론小論 온건파의 영수는 이광좌와 이태좌. 소론정권은 반란세력을 옹호하기보다 붕당의 존립을 위해 잘라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진압군의 막후에는 봉조하 최규서가 있었고 총지휘는 이광좌, 이태좌가 맡았으며 진압책임은 병조판서 오명항과 이태좌의 조카 박문수가 담당했다. 고뇌어린 선택으로 소론은 일부나마 정권을 지켰으며, 경주 이씨는 가문을 지켜냈지만 강경파에 속했던 평택·안성지역의 진주 소씨, 원주 원씨, 전주 이씨, 안동 권씨, 하동 정씨, 장수 황씨 등과는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위기는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이 소론의 영수로 영의정에 올랐을 때도 찾아왔다. 당시에는 노론이 정치를 주도했고 영조의 후계자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소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정권의 미래가 불안해진 노론老論은 적극적으로 사도세자를 모함하며 소론을 역적으로 몰아 압박했다. 이종성은 사도세자 편에서 적극 변호했다. 하지만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았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옹호했던 세력들은 한동안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 때는 소론계가 배후로 지목돼 소론의 주요 인사 500여 명이 사형됐고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되었다. 또 이미 사망한 소론의 주요 인물들도 삭탈관직削奪官職 됐을 정도로 피해규모가 컸다. 이처럼 영조 후반기 소론계 전체가 위기상황으로 몰렸지만 경주 이씨 가문은 정치·사회적 위상을 지켜냈다. 후손 이경일은 정조 말년부터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순조 초까지 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두루 거쳤고, 이유승의 조부 이석규와 부친 이계조도 세도정치기에 판서를 지내 삼한갑족의 위세를 유지했다.

   
▲ 백사 이항복(사진제공/(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 구천 이세필(사진제공/(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 귤산 이유원(사진제공/(사)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 기획취재단(중국 만주팀)

글 /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사진 / 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진행 / 임봄 평택시사신문 취재부장
조사 /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

디자인 / 김은정 디자인팀장
캘리그래피 / 정아름 작가

 

후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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