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향가를 악질 친일음악가
친 독재 성향의 음악가가
작곡했다는 것은
시민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지역의 수치다

 

   
▲ 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바라보면 가이 없는 천리평야에 비단위에 무늬처럼 고운 솔뫼들 진위안성 두강물이 하나로 흘러 서해물결 굽이치는 평택 내 고향”

평택시민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평택애향가 1절이다. 평택애향가는 1970년대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각 시·군에서 애향가를 만들 때 평택군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유달영 교수와 작곡가 이홍열 씨에게 의뢰해 곡曲이 만들어졌다. 최근 경기도 모 일간지에서 ‘평택애향가’를 작곡한 이홍열의 친일문제를 거론했다. 평택시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고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작사가 유달영, 작곡가 이홍열은 누구인가?

유달영(1911~2004)은 일제강점기 서울고등농림학교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최용신과 브나로드운동을 펼쳤으며, ‘성서조선’ 사건으로 김교신, 함석헌과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부임한 뒤에는 우리나라 농학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후학을 양성해 농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수필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해 젊은이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도 앞장섰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흠이라면 5공화국 시절 전두환 정권에 협조한 것뿐이다.

반면 ‘바우고개’, ‘꽃구름 속에’와 같은 주옥같은 가곡을 작곡한 이홍열은 다르다. 그는 민족의 양심을 팔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에도 반성하지 않고 친親 독재 행보를 거듭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음악교과서에도 실려 학생들이 애창했고 각 시·군의 애향가를 작곡해 지역민의 입을 더럽혔다. 일제 말 그의 친일 행적을 열거해보자. 그는 1931년 홍난파가 졸업한 도쿄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1933년 서울로 올라와 활동했고 전시 체제기에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다. 1941년 친일단체 조선음악협회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고, 국민총력연맹 문화위원이며 조선음악협회 이사였던 히라마 분쥬의 고별음악회에서도 연주했다. 그의 친일행각은 1943년 ‘노오키’로 창씨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현제명, 김성태가 중심이 된 친일어용단체 ‘국민총력연맹’ 산하의 ‘국민가창운동정신대’에 적극 동참했을 뿐 아니라, ‘반국가(반일)적 음악을 축출하고 옹위한 일본음악을 수립하겠다’는 목적의 ‘대화악단’을 창단해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

하지만 이홍열은 해방 후 이 같은 적극적 친일행각을 반성하거나 사죄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 ‘조선음악건설본부’에 참여했으며, 해방되던 해 10월에는 친일음악가 김성태, 안병소 등과 ‘조선음악가협회’ 창립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3·1절 기념야외음악회’를 개최하거나 ‘전래동포세말구제음악회’를 개최한 것에서도 그의 파렴치하고 야비한 속성이 엿보인다. 1946년에는 현제명이 조선음악가협회를 계승한 ‘대한음악가협회(현 한국음악협회)’를 조직하자 이를 비판하고 ‘조선연주가협회’를 창립했다. 정부 수립 뒤에는 ‘민족정신양양전국문화인총궐기대회’에 참여해 음악회를 개최했으며, 이 같은 행보로 함께 일했던 친일음악가들과 함께 문교부예술위원과 서울시문화위원이 됐다.

우리고장 ‘애향가’는 평택시민의 정신이며 자긍심이다. 이 같은 애향가를 악질 친일음악가, 친 독재 성향의 음악가가 작곡했다는 것은 시민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지역의 수치다.

필자는 평택시의 문제 제기를 환영한다. 이 기회에 우리가 우러러볼 수 있는 훌륭한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애향가를 만들자. 애향가를 부르는 평택시민의 가슴에 자부심과 긍지가 뚝뚝 묻어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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