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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100년의 함성과 만석꾼의 꿈을 찾다 ⑥
평택시사신문  |  ptsi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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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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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한 큰 희생, 기억하는 이 없는 이석영


수천억 원의 재산을 오직 민족독립을 위해 기꺼이 바쳐
존폐위기에 놓인 경학사·신흥무관학교 살린 것은 이석영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 다물단 단장, 김달하·박용만 처단
아들 이규준·이규서 죽음으로 이석영 극도의 슬픔 겪어
고위관직 지낸 조선 10대 거부 이석영, 객창에서 굶어죽어
이석영, 유해봉환 노력 없었고 국립현충원에 위패 못 모셔

 

   
⑥ 망국의 대부 이석영 객창에서 생을 마감하다
 
   
▲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 이유원의 99칸 별서가 있었던 터(사진 가운데 전나무와 은행나무 사이)와 587살의 은행나무

 

■ 거부巨富가 살았던 남양주에는 쓸쓸한 기운만이 감돌아
이석영의 흔적을 찾는 일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애매하다. 백사 이항복의 유허가 있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석영의 직계 조상인 이태좌, 이종성의 묘비墓碑를 만났다. 가평군 율길리에 있었던 묘역이 후손의 불찰로 파묘되면서 묘비만 옮겨놓은 상태였다. 한 때 삼한갑족이라 높임 받았고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명문가의 뒷모습치고는 참 씁쓸한 풍경이었다.
독립운동 자금마련을 위해 방매放賣한 뒤 관리가 부실하여 이제 폐허만 남은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유허나, 후손이 끊겨 관리가 소홀한 수동면 묘역도 마찬가지였다. 500년이 넘었다는 가곡리 은행나무 좌우로 한 때 99칸에 달했다는 대저택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추억으로만 남아있었으며, 모처럼 벌초했다는 가오실대감 이유원과 그의 조부 이석규 묘역은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묘역치고는 관리가 매우 허술했다.

   
▲ 옛 만국공묘의 외국인묘원에서 100년의 함성과 만석꾼의 꿈을 찾다 중국 상해특별취재단


귤산 이유원이 가곡리에 별서를 지은 시기는 최소한 187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유원은 별서를 지은  뒤 이곳에서 한양을 오가며 관직생활을 했고 또 <가오고략>을 저술했다. 주민들은 아직도 가곡대감(가오실대감) 이유원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들의 기억은 부모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거나 어릴 때의 경험,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가오실대감 이유원의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이효구(남·85) 씨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씨는 어린시절 이유원의 별서를 놀이터삼아 놀았고 그의 부친은 이유원의 재산을 매입했던 백상규의 마름을 봤다. 이 씨는 화도읍내에서 가곡리로 넘어오는 너브내고개부터 천마산 일대가 가오실대감의 소유였다고 말했다. 그 면적이 자그마치 700정보(210만평)나 되었다고 한다. 또 가곡리 은행나무 일대 대지垈地도 모두 그의 소유였으므로 역사학자 왕현종 교수가 밝힌 267만평과 비슷하다. 이 씨는 ‘가오실(가곡리)’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유원 별서의 당호堂號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므로 당시 가곡리는 ‘이유원 타운’이라고 할만하다.
이석영은 이 땅을 처음에는 전주 이씨에게 방매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직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내다 납북된 백상규에게 방매되었으며, 1980년경에는 (주)대우로, 대우그룹이 해체된 뒤에는 세계물산을 거쳐 이담골드라는 회사로 넘어갔다. 이석영이 방매한 전답과 임야가 700정보 이상이라면 일반인들이 쉽게 매입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전주 이씨 가운데는 대단한 재력가가 없었다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이석영이 전주 이씨들에게 토지를 매매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대충 가진 돈만 받고 헐값에 팔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팔아서 마련한 독립자금이 40만원(현재의 가치로 약 1000억 원 규모)이라면 제대로 팔았을 경우 그 금액은 상상할 수 없다.
같은 마을 이경춘(남·76) 씨의 기억도 흥미롭다. 이 씨 부친은 백상규의 청지기였던 김대린 밑에서 일을 봐줬다. 김대린은 관리인 자격으로 오랫동안 이유원의 별서에 거주했다. 김대린이 거주할 당시 은행나무 옆 슈퍼건물과 뒤편의 요양원 건물 등 주변이 모두 이유원의 집터였다. 별서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별당, 연당으로 구성되었다. 이 씨는 가곡대감이 살 때는 “방안에 촛불을 켜고 갖고 싶은 땅을 말하면 모두 그의 것이 되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무소불위 권력으로 화도읍 일대 땅들을 매입했다는 말이다. 남양주 일대를 쥐락펴락했던 가오실대감 이유원은 1885년 이석영을 양자로 들이고 몇 년 뒤 사망했다. 그 재산이 고스란히 이석영에게 상속되어 독립운동에 쓰였음은 물론이다.

   
▲ 1981년 송경령능원으로 명칭이 바뀐 옛 만국공묘의 외국인묘원

■ 독립운동에 모든 것 바쳤지만 개인적으로는 불우해
이석영의 만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억만금의 재산으로 경주 이씨 형제들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서간도 정착을 도왔다.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 교사校舍를 합니하로 이전 신축하고 학교운영비를 제공했던 것도 이석영이었다. 정착초기 몇 년 동안 서간도 일대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흉년은 경학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자치기관 뿐 아니라 피땀 흘려 키운 신흥무관학교를 존폐存廢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때에도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살린 것은 이석영의 재력이었다. 심지어 신흥무관학교를 바라보고 만주로 올라온 젊은이들을 몇 년 씩 그의 집에서 먹이고 재웠다고 하니 독립운동에 바친 그의 헌신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이석영에게는 가족의 생계나 최소한의 체통을 지킬만한 재산조차 남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은 만주지역을 고무시켰다. 만주 한인들은 만세운동을 조직하는 한편 자주독립의 부푼 꿈을 안고 국내에서 올라오는 청년들을 모아 전사로 교육시키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국내진입작전을 펼쳐야 했다. 실제로 국내진입작전을 펼치다 반격을 받은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들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1920년 말에서 이듬해까지 만주일대 우리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주택과 교회, 공공시설에 방화했다. 엄혹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몸을 숨기거나 피해야 했다. 이석영은 70대 중반의 노구를 이끌고 심양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나중에 베이징을 거쳐 톈진, 상하이로 옮겨 다녔다. 베이징과 톈진에서 이석영의 생활은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다 못한 이회영이 톈진으로 찾아와 살림을 합쳤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는 악조건 속에서도 경주 이씨 가문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독립운동은 이들의 정체성이며 중국망명을 결심한 이유였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이회영, 유자명, 이규학과 다물단을 조직하여 일제 요인암살, 밀정처단과 같은 활동을 했다. 다물단은 1925년 일제의 고급밀정 김달하와 독립운동가였던 박용만을 처단했다. 김달하 처단은 다물단의 입지와 활동에 큰 타격을 줬다. 중국 경찰은 김달하 암살을 오해하여 다물단을 압박했다. 더구나 의열단원 나석주의 폭탄의거 후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어려운 상황에서 다물단 단장으로 활동하던 장남 규준이 사망했다.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의혹을 제기하는 쪽도 있어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아들 규준은 이석영이 40세가 넘어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어쩌면 그가 북경과 톈진을 옮겨 다닌 것도 이규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후사도 없이 사망하자 이석영은 극도의 슬픔과 절망에 빠졌다.

   
▲ 115년의 역사를 간직한 서가차천주교회와 서가차 객창이 있던 주변의 현재 모습
   
▲ 이석영 선생이 1928년 상하이로 이주해 처음 거주했던 아미로


1928년 이석영은 거처를 상해로 옮겼다. 동생 이회영은 1930년 이후 중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손잡고 항일구국연맹과 산하에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이시영은 상하이임시정부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큰 슬픔이 거듭 닥쳤다. 하나는 일본군 관동군 사령관 암살계획을 갖고 상하이 황푸강에서 배를 타고 다롄으로 떠났던 이회영이 정보누설로 일경에게 잡혀 고문 끝에 사망한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이회영의 죽음 배후에 둘째 아들 규서가 연루됐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규서는 이석영의 집에서 조카 이규창에게 유인되어 백정기 의사에게 처단 당했다. 최애最愛하던 동생 이회영의 죽음, 철없던 막내아들의 죽음 앞에 이석영은 무너져 내렸다.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이석영을 도운 것은 막내 이호영이었다. 1933년 이호영은 중병에 걸린 둘째 형님을 만주 봉천을 거쳐 국내로 들여와 치료하게 했다. 하지만 대쪽 같던 선비 이석영은 독립운동의 거처를 버리고 일제 치하에서 산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동생에게 거짓으로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겠다며 여비를 챙긴 뒤 다시 상하이로 향했던 이유다. 상하이에서 이석영은 객창客窓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연명했다. 연명延命이었다.

   
▲ 1934년 02월 28일자 동아일보 조간에 실린 이석영 영면 보도 내용
   
▲ 중국 상하이 아미로 객창
   
▲ 서울 현충원 순국선열영위에는 애국지사묘역에 잠들지 못한 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지만 이석영 선생의 위패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 ‘망국의 대부’ 이석영 상해 객창客窓에서 죽음 맞아
이석영은 1934년 상하이 아미로 어느 객창에서 두부비지로 연명하다가 숨을 거뒀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아무 것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고위관직을 지낸 조선 10대 거부’, ‘망국의 대부’라고 불렸던 거인巨人의 죽음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사망 당시 이시영은 임시정부와 함께 항저우로 피신한 상태였고, 이회영의 죽음, 이규준의 처단으로 마음의 상처와 갈등을 겪은 동생과 조카들은 적극적으로 장례조차 치르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백범 김구가 나서 ‘동지들에게 돈을 걷어 장례비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김구는 적극 나섰는데 항저우에 함께 있던 동생 이시영은 왜 침묵했는지 의문이다. 이석영은 상하이 홍교로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중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묻히는 허름한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 2월 경주 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좁게는 만석꾼 이석영 선생의 독립운동 흔적을 쫓아 상하이로 날아갔다. 1928년 상하이로 이주했던 이석영은 처음에는 아미로, 나중에는 서가차에 거처를 마련했다. 문화대혁명과 근래의 급격한 도시개발로 옛 경관을 많이 잃어버린 상하이에서 이석영의 흔적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미로에는 옛 거리가 일부 남아 있어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옛 집터와 객창의 위치를 가늠했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 가운데는 일제강점기 아미로 일대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거처였다는 증언을 했다. 이석영도 이 거리 한 귀퉁이에 거처를 마련하고 곤궁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서가차에는 115년의 역사를 간직한 ‘서가차천주교회’가 있다. 이곳은 이석영의 두 번째 거처다. 1933년 경 이석영이 상하이로 다시 돌아와 머문 곳도 이곳 서가차 객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이곳에서 동생 이회영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삼촌을 밀고한 아들 이규서의 죽음을 보았으며, 객창에서 머물 때는 병약해진 몸으로 두부비지로 연명하다가 쓸쓸히 사망했다. 인생의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순간이 이곳에서 있었다. 현재 서가차천주교회는 옛 모습 그대로지만 주변은 크게 변했다. 골목도 대부분 사라졌고 큰길가에는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고층빌딩들이 치솟고 있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위치한 프랑스조계지


<평택시사신문> 중국 상하이 취재단은 프랑스조계의 임시정부청사와 루신공원으로 바뀐 옛 훙커우공원, 모이당과 삼일당, 육삼정, 이회영이 배를 타고 다렌으로 떠났다는 황푸강을 거쳐 만국공묘로 향했다. ‘송경령능원’으로 이름이 바뀐 홍교로의 ‘만국공묘’는 박은식, 노백린, 신규식 등 임시정부를 이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묘지이며 근처 어딘가에는 상하이 객창에서 숨진 이석영도 묻혔었다. 하지만 묘역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박은식 등 독립운동가들은 이장되었고 1991년 경 국내로 봉환되었지만, 근처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이석영의 유해는 돌보는 이 없이 상하이 재개발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석영은 중국 뿐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도 홀대 받았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연구도 이회영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진즉 추진되었어야 할 유해봉환 노력도 없었다. 오랫동안 서훈조차 받지 못하다가 1991년이 돼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을 뿐이다. 후손들도 절손되었고, 경주 이씨 묘역이나 국립현충원 어느 곳에도 제단이나 묘표, 위패 하나 얹어 놓은 곳이 없다. 억만금의 재산과 온 몸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친 인물에 대한 예우치고는 지나치게 소홀하다 아니할 수 없다.

 

■ 기획취재단(국내·중국 상하이팀)

글 /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사진 / 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진행 / 임봄 평택시사신문 취재부장
조사 /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

디자인 / 김은정 디자인팀장
캘리그래피 / 정아름 작가

 

후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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