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계각층이 참여한 3·1운동,
평택의 시위는 광포狂暴했다

 

일제 자료, 평택지역 3·1운동 ‘광포하다’ 기록
종교인·학생·공무원 등 각계각층 시위에 참여
비폭력 시위뿐만 아니라 공세적 시위도 존재

 

평택문화원은 지난 3월 7일부터 4월 4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평택시남부문화예술회관 3층 세미나실에서 다섯 차례 ‘평택학 시민강좌’를 진행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번 강좌는 다양한 역사학자를 초청해 ‘3·1운동과 평택’을 주제로 더욱 뜻깊은 강연이 펼쳐졌다.
<평택시사신문>은 ‘평택학 시민강좌’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평택지역 3·1운동을 시민에게 알리고, 사실을 기반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당시 3·1운동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김해규 /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 제1강 ‘민중이 주체가 된 평택 3·1운동’
김해규 소장/평택지역문화연구소

일제, 평택지역 3·1운동 ‘광포하다’ 표현
초기 천도교인 중심 만세시위 주도적 전개

평택지역의 3·1운동은 3월 9일 현덕면에서 시작돼 4월 10일까지 약 1개월 동안 전개됐던 민족운동이었다. 평택지역에서는 진위군 북면 봉남리와 병남면 평택리를 비롯해 약 25차례에 걸쳐 600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257명이 체포됐으며, 인명피해는 사망 64명, 부상 174명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평택지역 만세운동을 ‘광포狂暴하다’고 표현했을 만큼 평택지역 3·1운동은 적극적이고 격렬했다.

평택지역 3·1운동 초기 봉기는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현덕면 옥녀봉과 계두봉에서부터 시작됐고, 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 시위도 이들이 주도했다. 초기에는 천도교 중심으로 전개됐지만, 점차 농민층이나 상인층, 농촌지식층, 관료층이 가담하면서 평택지역 3·1운동이 확대됐다.

평택지역 3·1운동은 초기에 비폭력적으로 전개되다가 일제의 검속과 탄압이 강화되면서 폭력화됐다.

 

▲ 이정은 /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

■ 제2강 ‘독립선언서, 작성과 배포 어떻게’
이정은 원장/대한민국역사문화원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독립선언 계획
유혈사태 우려해 태화관서 독립선언서 발표

민족대표들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유교적 전통의 한국 사회에 새로운 종교였으며, 당시 대중에게까지 크게 인정을 받는 상태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도성 출입을 금지 당해왔던 열악한 사회적 위치에 있었다.

이들 민족대표는 사회적인 동원력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먼저 민중의 신망을 가진 비중 있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박영효·윤치호·한규설·김윤식·윤용구와 같은 인물과 교섭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종교계 인물 33인은 이런 인사들이 거절 또는 유보하는 태도를 보임에 따라 3·1운동 전면에 나서게 된다.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학생과 민중들로 하여금 만세시위를 감행하기로 했다. 원래 민족대표 33인과 학생 대표는 당시 파고다공원이라고 불렸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일 예정이었지만, 이곳은 많은 시민이 모이는 장소라 유혈사태를 우려한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했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팔각정에서 기다리다 결국 학생 대표가 오후 2시 30분쯤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모여 있던 시민들에게 준비했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줬다. 이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기 시작했다.

 

▲ 임형진 /
경희대학교 교수

■ 제3강 ‘민족대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임형진 교수/경희대학교

민족대표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 구성
3개 종단 민족대연합전선, 독립운동 결정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 선생은 독립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거족적인 시위 운동을 일으켜 우리 민족의 독립 열망을 대내외에 알리기로 결정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을 정했다.

손병희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되고 종교단체만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계도 독립운동에 동참시켜야 민족대표로서 명분이 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본 유학 시절부터 친교가 있는 양양군 통천면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과 해인사 승려 백용성을 대표로 참가시켰다. 이렇게 민족대연합전선이 이뤄졌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등 33인으로 결정됐다. 3·1운동은 고종 임금이 독살됐다는 소문으로 국민감정이 고조된 가운데 국장國葬이 3월 3일로 정해졌기 때문에 국장을 앞두고 지방에서 많은 사람이 상경할 것으로 판단해 이날로 정했다.

 

▲ 이동근 /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 제4강 ‘수원3·1운동, 기생도 만세 불러’
이동근 학예연구사/수원박물관

3·1운동, 노동자·지식인·기생 누구나 동참
기생, 궁중 관기 후예 정통성 갖고 참여

조선 시대 기생은 진찬, 진연과 같은 궁중 잔치에 동원돼 노래와 춤을 펼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평소에는 내의원과 혜민서에 속해 있으면서 의술을 펴는 의녀 즉, 약방기생과 상의원에서 왕과 왕비의 의복을 지어 바치는 침선비인 상방기생으로 나눴다.

하지만 국가에 소속된 일종의 공인 예술가로서 ‘관기’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은 일제에 의해 1908년 9월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이 제정되면서 모든 기생이 기생조합에 가입해 영업 허가를 받아야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경남 진주와 경기 수원, 안성 등에서 일어난 기생들의 3·1운동은 단순한 의기의 행동이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 통제에 대한 저항이자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행위였다. 기생들은 궁중 관기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입지를 강조하고자 했고, 국부를 잃은 슬픔을 곡성으로 표출하며 전통을 이어간다는 민족적 명분을 내세우고자 했다.

 

▲ 성주현 /
숭실대학교 교수

■ 제5강 ‘3·1운동은 비폭력적이었나’
성주현 교수/숭실대학교

공세적 만세시위를 벌인 평안도·황해도 지역
3·1운동이 비폭력운동이었는지 연구 필요해

일반적으로 3·1운동의 ‘역사적 평가’ 내지 ‘의의’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강조하고 있다. 3·1운동을 비폭력 평화적이라고 하는 것은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평화주의와 공약삼장의 ‘질서 존중’ 등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우선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는 비폭력 평화적 만세시위뿐만 아니라 적극적이고 ‘공세적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도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는 3·1운동 초기부터 공세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 적지 않았다. 이들 지역에서는 만세시위를 전개한 초기부터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 공세적으로 대응했는데, 강서군과 맹산군, 수안군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강서군과 맹산군, 수안군의 공세적 만세시위는 첫째 3월 초에 집중됐다는 점, 둘째, 헌병분견소와 헌병을 살해했다는 점, 셋째, 종교인이 주도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지역의 만세시위를 통해 3·1운동이 반드시 비폭력운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정리 / 허 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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