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이야기

‘쌍용자동차’를 이야기 하려면 ‘콧수염’을 심벌마크로 격동의 한 시대를 넘은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 회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54년 창설된 ‘하동환자동차’는 소방차나 건설장비, 레미콘 차, 버스 등 특수차량 제작이 주력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의 미래를 내다본 한 지혜로운 젊은 청년 하동환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드럼통을 일일이 두드려 펴서 만든 수제 차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집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팔리지 않는 차, 아무나 타고 다닐 수 없는 차, 게다가 엄청나게 비싼 차만 만들던 하동환자동차였지요.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엔진은 국내생산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지만 하동환이 펼쳐가는 자동차 산업에 대한 꿈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쉽게 가지 않으려 하는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오직 자동차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사업을 이어갔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차츰 특수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하자 하동환은 차츰 사업을 확장해나갔습니다. 인천에 있던 ‘신진자동차’를 인수합병하면서 ‘하동환자동차’는 ‘동아자동차’로 회사 이름도 바뀌게 됩니다.
省谷 김성곤은 왜정시대 ‘보성전문’ - 현재 고려대학교 유도선수였습니다. 굳건한 체력단련과 강인한 정신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 방학기간 동안 김성곤은 서울부터 부산까지 국도를 따라 걸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했던 일화는 그 뒤 많은 운동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하동환자동차 설립자 하동환이 세운 ‘하동환공업사’는 1962년 동방자동차공업주식회사와 합병하면서 하동환자동차공업주식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하동환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동아자동차’로 이름을 바꿉니다. 한편 인천에서 자동차를 만들던 신진공업사 - 신진자동차는 (주)거화로 이름을 바꾸고 역시 일반 승용차가 아닌 당시만 해도 특수차 대접을 받던 지프차 모양의 'SUV'를 생산하던 (주)거화를 인수하며 시장을 확대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후 정부의 자동차산업에 관한 관리법이 바뀌게 되면서 기아, 대우 등 다른 자동차회사들에게 영역을 잠식당하게 되었고 결국 거대자본에 맞서지 못했던 동아자동차는 ‘쌍용’ 그룹에 인수되면서 쌍용자동차가 탄생했습니다. 1970년대 성곡 김성곤이 사업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일본사람과 함께 ‘스시’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던 김성곤은 음식에 맛이 들려 1인분, 1인분… 하며 계속 ‘스시’를 주문했습니다. 소식小食을 생활 철학으로 지키고 있는 일본사람들은 ‘성곡’의 식성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성곡’이 이제는 배가 적당히 찼으니 그만 먹어도 되겠다며 젓가락을 놓았을 때는 이미 ‘스시’ 30인분을 먹은 뒤였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스시’집 사장이 나왔습니다.
-‘스시’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우리 집에 오신 손님 가운데 선생님이 저희 집 음식을 가장 많이 드셨습니다. 저희가 만든 음식이 맛이 있다고 생각을 하셔서 많이 드신 것으로 알고 오늘 음식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음식점 사장과 전 종업원은 ‘성곡’ 앞에서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성곡‘은
-그렇다면 예의와 범절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인이 공짜 밥을 먹고 그냥 갈 수 없으니 나도 보답을 하지요.
‘성곡’은 ‘스시’집 사장의 대접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지갑을 꺼내 ‘스시’집 전 종업원에게 ‘일만엔丹‘씩 ‘팁‘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쌍용자동차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하면서 평택지역 경제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쌍용자동차 가족들은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나와서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고 영화구경도 가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사기도 했지만 생산라인이 멈춰서면서 행복도, 경제도 멈추고 말았습니다. ‘소수정예’로 자동차시장을 공략하던 동아자동차는 너무 앞서간 경영전략으로 오히려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미래가 보장된 자동차산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아자동차를 넘보는 기업이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막에다 난로를 팔고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심정으로 한국 자동차산업의 황무지를 일구어낸 동아자동차의 축적된 기술에 자본만 투자를 하면 성공은 보증수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는 회사 모두가 동아자동차에 군침을 흘렸습니다. 기존의 자동차 회사들은 ‘물밑에서’ 각축전을 벌이며 어떻게 해서든 ‘동아자동차‘를  집어삼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기아’가 유리한 고지에 있다. ‘대우’와 협상이 잘 이루어져 곧 인수합병 될 것이다. 하지만 ‘대우’? ‘기아’?  천만의 말씀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동아자동차‘의 새 주인은 ‘쌍용’이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성곡’ 김성곤 선생이 살아생전 사업을 하면서 끝까지 ‘동아자동차’에 보여준 신뢰와 믿음에 대한 보답이다. 돈 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신용과 신의와 배려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쌍용’을 선택했다.
‘쌍용’의 믿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쌍용’을 일으켜 세웠던 ‘배려와 협동’ 정신이 깨지고 있습니다. 2600명이나 되는 ‘쌍용’가족이 이유도 없이 부당해고 당했고 ‘쌍용’에 젊음을 바쳤던 산업역군 23분이 고통과 분노를 참지 못해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던 ‘도일천’ 냇가에 ‘쌍용’의 피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쌍용’의 대 재앙
한시바삐 정부政府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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