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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평택의 전통예인-20
박성복 기자  |  sbbar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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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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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두레와 걸립의 평택농악은
경기·서울·인천·충청권과
강원도 영서지역을 포함한
웃다리지역 대표 농악이다

 

평택농악, 전문연희패 걸립굿과 마을두레굿 특징 잘 보여줘
팽성읍 출신 최은창, 현재와 같은 평택농악의 편제를 구성
평택농악, 이승만생일기념 전국농악경연대회 2년 연속 우승

 

   
▲ 평택농악 판굿 무동놀이




Ⅲ. 평택의 예인藝人
3. 농악

 

4) 평택지역 농악의 유래와 전승

■ 웃다리지역을 대표하는 평택농악

농악은 우리 선조들의 감성과 직감이 낳은 문화유산이다. 우리민족의 심성이 가장 잘 표현된 민중의 음악이요 춤이다. 이러한 농악은 농경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렵시대에 짐승몰이를 위한 타악기 사용이 그 시원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악기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전해진다. 농악은 이러한 행위에서 발전해 마을 농악대가 형성되고 지신밟기와 두레농악으로 발전해왔다. 농악은 지역에 따라 명칭도 조금씩 달라지고 내용과 형식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농악은 풍물·두레·풍장·굿이라고도 한다. 농악은 농경문화에서 김매기·논매기·모심기 등 힘든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나아가서는 협동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각종 명절이나 동제洞祭, 걸립굿, 두레굿과 같은 의식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고 있으며 가락과 악기를 변형한 사물놀이나 타악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전국 6대 농악 분포도

우리나라의 농악은 크게 경기·서울·인천·충청권 전역과 강원도 영서지역이 속한 웃다리농악,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동부 산악지역의 호남좌도농악, 전라도 서부 평야지역의 호남우도농악, 경상도 지방의 영남농악, 태백산맥 너머의 영동농악 등으로 나누어진다.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의 대표성을 인정받은 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 6곳의 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이다.

농악을 크게 분류하면 충청도 이북의 웃다리농악과 남도지방의 아랫다리농악으로도 구분한다.

평택은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과 같은 동쪽에 산이 집중된 반면 서쪽으로 가면서 평야와 해안에 접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갖고 있다. 근현대 활발히 진행됐던 간척사업과 평택호방조제 축조가 이뤄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쪽 지역은 농업, 서쪽 지역은 어업을 생업으로 했던 동농서어東農西漁의 산업구조를 띠고 있었다.

   
▲ 평택농악 당산굿 고사소리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의하면 평택은 해일과 홍수·가뭄·우박·바람 등의 자연재해가 잦은 지역으로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사람은 물론 농작물과 염분·어전·배 등의 피해가 매우 심했다.

농업과 어업은 기상환경과 자연재해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평택사람들에게는 기복과 축원의 문화가 발달했으며 평택 동북부지역에서는 풍년 농사를 위한 두레굿과 도당굿·당제·줄다리기가 성행했고, 서부 해안지역에서는 풍어와 해상안전을 위한 풍어제와 도당굿·당제가 민속신앙으로 발달했다.

   
▲ 평택농악 판굿 동고리

이처럼 잦은 자연재해를 기원과 축원의 문화로 극복하기 위해 평택에서는 남사당과 농악·민요·도당굿·줄다리기·거북놀이 등 공동체 민속문화가 성행했다. 다양한 분야의 공동체 놀이와 민속신앙은 전통 예인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이 됐으며 이로 인해 평택에서는 오래전부터 국보급 예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평택농악은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를 중심으로 경기·충청권 전문 연희패의 웃다리농악과 팽성지역 평궁리 두레농악이 결합돼 형성된 농악農樂이다. 1970년대 이전 경기도와 충청도지역에는 걸립패, 사당패 등 상당히 많은 전문 연희패가 활동했는데, 평택농악은 이들 전문 연희패의 명인들이 중심이 되고, 평궁리 마을 두레농악이 결합돼 형성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두레농악은 정초나 대보름에 지신밟기를 하거나 농사철에 두레풍물을 치던 놀이를 말한다. 두레조직은 해방 후에서 1970년대 이전 사이까지만 해도 논농사가 발달했던 농촌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형성됐던 공동노동조직인데 두레농악은 두레노동을 할 때 함께 행해졌던 놀이였다. 일제가 1941년에 발행한 <조선의 향토오락>에도 “제초기간 중에 농민들이 농악을 놀았다”라는 기록과 “7월에 농민들이 주체가 돼 호미씻이를 했는데 경기도 타지방과 동일하다”라는 기록이 있어 일제강점기 말까지도 두레노동과 함께 두레농악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이전 평택지방의 대부분 마을에는 두레농악패가 있었는데, 평궁리 두레농악패도 그 중 하나였다.

두레굿과 걸립굿의 대명사로 불리는 평택농악을 지금과 같은 편제로 육성한 최은창崔殷昌과 이돌천李乭川 명인은 평택농악을 웃다리지역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키운 장본인으로 그 공로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평택은 질박한 서민의 정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인을 껴안을 줄 알고 그들이 터를 잡아 생활하도록 배려할 줄 아는 문화적 토양을 지닌 고장이다.

사당패는 평택의 소사뜰·오성뜰, 진위 장안뜰, 진위 마산뜰, 천안 성환뜰, 아산 둔포뜰, 멀리는 예산, 아산 삽교, 당진 합덕뜰에 이르기 까지 놀이판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등살에 전국적으로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그 명맥을 유지한 것이 바로 ‘평택걸립패’였다. 걸립패는 교량·학교·관공서 등을 건립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됐고, 또한 예인들로서는 생계유지 수단이기도 했다.

평택농악은 이때부터 두레풍물과 걸립풍물굿을 가장 잘 계승한 웃다리지역 대표 풍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두레농악에서 하던 지신밟기, 두레굿과 더불어 난장굿, 절걸립, 촌걸립 등 걸립패에서 하던 전문연희패적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는 평택 팽성읍 원정리 출신 최은창이 전문 연희패에서 활동했고 초기 구성원들이 서울·경기 남부·천안·공주 지역에 흩어진 명인들로 구성돼 전문 연희패적 성격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즉, 평택농악은 팽성읍 평궁리 마을의 두레농악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평택의 두레농악을 대표한다기보다는 경기·충청지방 전문 연희패의 가락과 판제를 계승한 웃다리농악이라고 할 수 있다.

‘평택농악平澤農樂’ 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6·25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 시절 대통령 생일을 기념해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였다. 평택농악의 명인 최은창崔殷昌은 당시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패를 구성해 ‘평택농악’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나갔다. 평택농악은 지금의 광화문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1958년과 1959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평택농악의 이름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됐다.

   
▲ 웃다리 평택농악의 총 본산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

웃다리농악을 대표하는 평택농악의 근거지이며 총 본산이라 할 수 있는 평택시 팽성읍彭城邑 평궁리平宮里는 평택시가지에서 안성천 너머 남서쪽으로 2㎞쯤 떨어져 있는 평야지대에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옛 부터 지신地神밟기와 두레굿 등 여러 농악을 세게 쳤다.

팽성읍 평궁리가 웃다리농악의 총 본산이 된 데는 ‘평택농악平澤農樂’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발전시켜 국가무형문화재의 반열에 오르게 한 웃다리농악 명인 최은창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창의 출생지는 팽성읍 원정리로 팽성읍 평궁리와는 4㎞ 떨어진 곳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평궁리로 이주해왔다. 예능적 감각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최은창은 마을 두레패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마을단위에서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연희패의 일원으로 절걸립패에 몸담았으며 성장하면서 독립해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 활동했다.

이후 최은창을 주축으로 한 ‘평택농악패’가 꾸려지고 이들은 절걸립으로 근근이 유지되어오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은 고향 평궁리에서 농사일을 하는 한편 간간히 지금의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이’를 육성한 ‘민속극회 남사당’ 활동을 해왔다.

마을마다 전해 내려온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위축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최은창은 평궁리에서 다시 평택농악을 부활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대외적 공연활동에 주력하면서 잊혀져가는 고사소리 채록과 복원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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