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1월 12일

떠돌아다니다가 절도 행각
열차식당 남은 빵으로 연명

 

 

 

“十二일 오전 十二시경 서대문경찰서 형사실에서 취조를 받고 있는 소년의 애소 한 막이 있다. 그는 진위군 서남면 군문리(振威郡 西南面 軍門里) 김수천(金壽千, 一五)이라는 소년이다. 물론 차림차림이 거지의 모양이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종합하여 보면, 이것도 차디찬 이 세상의 한구석에서 반영(反映)되는 이야기 깜으로 들을 만한 것이다. 그는 부모의 품안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중략) 경성역 구내(構內) 한 모퉁이에다가 움막(土幕)을 짓고 값없는 목숨을 의지하여 지내오다가 주림과 추움이 그네들로 하여금 절도의 문을 『노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착으로 열차 식당(食堂)에 들어가서 남이 먹다 남은 『빵』조작을 주어먹다가 식당 『쿡』에게 벼락침을 맞고 (중략) 주석(眞鍮)으로 만든 그룻(器) 몇 개를 훔치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절도라는 죄명을 입고 그와 같이 경관의 손에 옮겨 오게 된 것이라 한다.”(『매일신보』 1935년 11월 13일)

일반적으로 신파극을 보면 때로는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이 저리기도 한다. 살기 어려운 사연이 담긴 신파극일수록 더 가슴을 저리게 한다. 요즘이야 거리를 떠도는 걸인이 많지 않지만 1930년대만 해도 거리에서 어린 아이들이 구걸하는 모습들이 적지 않았다. 이 참상은 애소哀訴 한 막이었던 사연이 있었다.

당시 진위군 군문리에 사는 15세 소년 김수천은 소시 적에 부모를 여의였다. 천애고아가 된 김수천은 자신을 돌보아 줄 친인척이 없자 거지와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7~8년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지내던 김수천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경성역, 지금의 서울역 한 모퉁이에 움막을 짓고 지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해보았지만 이를 구제해 줄 사회적 안전망이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김수천 등은 ‘절도’라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들은 서울역에 정차된 열차 식당에 숨어들어가 승객들이 먹다 남은 빵을 주워 먹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그만 주방장에게 들켜 ‘벼락침’을 맞았다. 그래도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던 김수천은 다시 열차 식당으로 들어가 유기그릇을 훔치게 되었다. 결국 절도행각은 발각되었고, 서대문경찰서로 넘겨지게 되었다.

요즘처럼 사회안전망이 잘 되었다면 김수천은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 사건은 1930년대 사회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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