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3월 15일

돈 모아 소개받은 여자와 결혼
장터에서 돌아오니 짐 싸 도주

 

 

 

“계란 행상을 하여 푼푼이 모은 돈으로 장가를 들어서 살림을 차렸더니 계란 행상 나간 틈에 새로 맞은 마누라가 이부자리까지 들고 도망하고 없으니 잠자리할 침구나 찾게 하여 달라고 十五일 본정서로 찾아가서 호소한 박명한 이가 있다. 그는 진위군 평택면 평택리(振威郡 平澤面 平澤里)에 거주하는 계란 행상 김호준(金鎬俊, 二九)으로 (중략) 집 안에서 기다려줄 줄로 알았던 처도 없고 장롱 속에 있는 의복이며 침구 같은 것까지 전부 가지고 행방을 감추고 없음으로 낙담을 하고 동리에 물으니, 十四일 정오경 서울을 향하여 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그날 밤 차로 서울에 와서 거처를 찾았으나 종적을 알 수 없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매일신보』 1936년 3월 16일)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곤 한다. 때로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좋은 일은 기사화 되지 않지만 남의 불행한 일이나 가슴 아픈 일이 오히려 기사화되는 경우가 많다. 예나 지금이나 살다보면 ‘박명한 이’가 적지 않았는데, 계란 행상의 가슴 아픈 일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평택리에 계란 행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29세의 청년 김호준이 살고 있었다. 1935년 12월경 이웃 마을에 사는 한 노파로부터 현 서울 중구 다동茶洞에 사는 29세 된 최정숙이라는 여자를 소개받았다. 호감을 가진 김호준은 최정숙과 이내 결혼을 하고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4개월 정도 행복하게 지내던 1936년 3월 14일, 이날 오후 4시경 성환 시장에서 계란을 다 팔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평소에는 김호준을 기다려주던 최정숙이었는데, 흔적도 보이지 않고 옷은 물론 이부자리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가지고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김호준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소문을 한 결과, 3월 14일 정오경 서울로 갔다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그날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최정숙이 살았던 다동에서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김호준은 하는 수 없이 현 충무로에 있는 본정경찰서로 가서 최정숙은 물론 잠이라도 잘 수 있도록 침구라도 찾아 달라고 호소하였다.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마도 중애한 노파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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