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11월 8일

밤만 되면 4~5인 작당, 주점에서 행패
이기영여관서 잠자리에 드는 손님 구타

 

 

 

“경기도 진위군 북면 봉남리(振威郡 北面 鳳南里)에는 요새에 一부 불량배가 밤만 되면 작당하여 돌아다니며 주점 등에서 폭행함이 빈빈한다는 바, 들은 바에 의하면 지난 八일 밤에도 모모 四五인이 작당하여 봉남리(鳳南里) 이기영(李基榮) 여관(旅館)에서 잠자려고 들어간 손님을 붙잡고 힐난 끝에 무수 난타코 돌아갔다는 바, 一반은 이들의 비행이 비일비재이므로 비난이 자자하다.”(『조선중앙일보』 1934년 11월 13일)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폭력사건 등 사회적 범죄가 더 많이 발생한다. 1934년이라는 시기는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한창 전시체제가 형성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불안한 요소가 없지 않았다. 때문에 강점기 사회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다보니 폭력사건이나 강도사건 등도 자주 발생해 불안감이 조성되었다.

1934년 11월 들어 평택에서도 폭력배들이 설쳐대면서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시 진위군 북면 봉남리(현재 진위면 봉남리)에는 불량배들이 밤만 되면 모여 행패를 부리면서 싸돌아다녔다. 주로 주점에 들어가 시비를 걸고 돈을 뜯어내는 등 폭행을 조장하였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마을 주민들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심하면 주민을 폭행하는 등 위협적인 행위를 자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11월 8일에는 폭력배 4~5명이 모여서 작당을 하였다. 이들은 여관에 투숙한 사람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기로 하였다. 이에 봉남리에서 이기영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몰려가 잠을 자거나 자려고 하는 손님들을 깨워 시비를 걸었다. 손님에게서 돈을 빼앗기도 하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투숙객을 두들겨 패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건이 빈빈頻頻 즉 자주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찰력은 주민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더욱이 보복이 두려워 신고도 제대로 못하였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봉남리 주민들은 한동안 불안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잠 못 드는 밤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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