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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평택의 전통예인-25
박성복 기자  |  sbbar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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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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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최은창 평택농악 명인은
16살 때 두레패 상쇠로 시작
평택농악 예능보유자가 됐으며
평생을 웃다리농악에 헌신했다

 

최은창, 1914년 팽성읍 원정리에서 출생 후 평궁리로 이주
20여 년간 ‘최은창 행중’이라는 이름 내걸고 유랑건립 활동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평택농악 정립 기여

 

   
▲ 최은창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예능보유자(1914~2002년)




Ⅲ. 평택의 예인藝人
3. 농악

5) 평택농악 예능보유자

■ 최은창崔殷昌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예능보유자로 지금의 평택농악이 있기까지 큰 업적을 남긴 최은창 명인은 1914년 4월 18일 평택시 팽성읍 원정리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아버지 최상순과 어머니 황간난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출생 직후 평택농악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평궁리로 이주해 살아왔다.

최은창은 13살에 팽성읍 객사리 부용강습소에 들어가서 3년을 공부했고, 평궁리 서당에서 2년 동안 한학을 공부한 것이 학업의 전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하게 귀가 밝았던 그는 스스로 예능적 기질을 키워나갔다. 여느 아이들이 소꿉장난이나 잔일거리를 하고 있을 때 그는 두레풍물을 보고 듣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무엇이든 손에 잡히면 두드려 집안의 그릇이 남아나지 않았고, 그것도 모자라 진흙으로 꽹과리를 만들어 두드리기도 했다.

   
▲ 최은창의 자택에 마련한 평택농악보존회 사무실

최은창은 마을 둥기래패 상쇠에게서 꽹과리를 배워 16살에는 마을 어른들의 권유로 평궁리 두레패에서 상쇠로 꽹과리를 쳐 근방에서 젊은 쇠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20살 되던 해에는 안성 서상현의 권유로 걸립패를 이끌던 이원보 행중에 들어가 장구와 끝쇠를 쳤다. 이원보는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일찍부터 풍물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풍물을 직업으로 삼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전문 연희꾼으로 주로 안성 서상현 집에 머물며 ‘서상현행중’의 상쇠를 쳤다.

1945년 32살의 최은창은 걸립에 나서기 위해 당시 거금인 3만환을 들여 말죽거리 장안사 주지 임사남에게 고사소리를 배웠다. 가사를 필사해 고사소리를 연습하고 걸립에 나섰는데, 최은창은 이때부터 독자적인 걸립패를 갖추고 고사소리를 연마할 수 있게 됐다. 소방서 걸립을 하고 있던 그에게 약수암 중수를 위한 걸립을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늘 고사소리의 부족함을 느끼던 최은창은 묘연암 유길동 스님과 유랑하던 탁발승 김인환으로부터 고사소리를 전수받고 자신의 고사소리를 보완, 발전시켜 약수암 걸립에 나섰다.

당시 보통 걸립패 이름은 그 패에서 유명한 상쇠의 이름을 붙여 행중의 이름을 정하기도 하는데 최은창 걸립패의 경우 화주는 윤노장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지만 사람을 모으고 걸립 공간을 만들고 연행을 하는 등 실질적인 화주는 최은창이었다. 그가 패 내에서 가장 뛰어난 잽이었기 때문에 ‘최은창 행중’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최은창 행중은 한국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약 20년간 유랑걸립을 했는데, 특히 절걸립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 최은창의 고사소리 육필 원고
   
▲ 최은창이 생전에 사용했던 꽹과리와 채

성인이 되면서 마을단위를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연희패에 가담하게 되고, 절걸립패에도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하여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 전국적인 무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그러면서 장고잽이로, 비나리꾼으로, 쇠꾼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최은창은 남운용 행중에 잠깐 몸담기도 했는데, 이원보 행중이나 남운용 행중은 모두 절걸립 성격의 연희패였다.

그러나 생업을 버린 것은 아니어서, 1년 중 농사철에는 팽성읍 평궁리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는 걸립패로 나서는 생활을 반복했다. 강제공출과 징용, 징병 등으로 걸립활동이 중단된 일제강점기 말이 지나고 해방이 되면서 걸립활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1945년 8·15해방 이후 웃다리풍물은 남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남사당 후예들과 이원보·송순갑 중심의 걸립패 출신들이 명맥을 이어왔다.

남사당은 남운형을 비롯해 조근영·송창선·김동현 등이 활동해 왔고 그 뒤를 김재원, 이수영, 남기환, 남기문, 송철수, 정일파, 양도일 등이 이어왔다. 걸립패는 이원보, 송순갑을 중심으로 활동해오다 최은창, 이돌천, 최성구, 이덕영, 전사섭, 김복섭, 박산옥, 최상근, 민창렬, 김문학, 김용래, 이성호, 임광식, 이복용, 김덕수 등이 뿌리를 전승해 왔다.

최은창, 이돌천, 김용래, 이성호 등 평택농악 명인들이 영향을 받은 걸립패의 최고 상쇠는 이원보였다. 중요한 걸립이나 규모 있는 대회에서는 이원보가 쇠를 잡았으며 장고잽이로는 평택농악의 최은창, 그리고 송순갑, 전사섭, 김복섭, 민창렬, 최상근 등이 이름을 떨쳤고, 법고잽이로는 평택농악의 이돌천과 김용래, 그리고 박산옥 등이 활동했다. 고사꾼으로는 평택농악 최은창, 그리고 이덕영, 김복섭 등이 유명했고 이중백, 차기준 등도 이름을 올렸으며 호적으로는 정일파를 알아줬다.

최은창은 1955년 남운룡악단南雲龍樂團에 가담해서는 장구를 치다 나중에는 부쇠를 쳤다. 그러다가 1960년 남운룡 등이 주도한 ‘민속극회 남사당’이 발족되면서는 장구를 쳤다.

최은창은 평택군의 요청으로 1958년과 1959년 ‘이승만대통령생신기념전국농악대회’에 ‘평택농악’ 기旗를 내세워 출전해 2년 연속 우승기를 차지했다. 평택농악은 30여명의 단원이 참여해 이원보가 상쇠를, 송순갑·최은창이 장고를, 이돌천·박산옥이 법고를, 김용래 등이 무동을, 이복용·김덕수가 사미를 맡았다.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도 유년기 평택농악에 몸담았던 것이다.

48세 때에 절걸립패 상쇠로 나선 최은창은 북한산 태고사와 인천 연화사 등 수많은 절 중수에 절걸립패를 이끌고 시주를 걷었다. 최은창은 평궁리 두레패를 중심으로 평택 일대에서 걸립을 했다. 이 때 걸립패의 인원은 28명이었는데 나중에는 소방서 걸립이나 절걸립도 하게 됐다. 절걸립은 서울 약수암, 적조암, 인천 연화사, 북한산 태고사 등에서 했는데, 이 가운데 태고사에서는 12년 동안이나 걸립을 했다.

이후 최은창은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했다. 남사당에서는 남운형을 비롯해 최성구·양도일·송창선·지수문·송갑순·정일파 등 당대의 명인들과 함께 활동하며 가락 치는 솜씨에 깊이를 더하게 됐다. 이중 송창선宋昌善은 평택시 서정동 출신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이 호적 예능보유자가 됐다.

   
▲ 평택농악 상쇠로 전성기를 누린 최은창(오른쪽)

최은창은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으로 걸립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걸립을 그만두고 농사에 전념했다.

이후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하던 최은창은 1980년 평택군과 평택문화원의 요청으로 평택 팽성읍 평궁리 사람들과 평택·안성·천안·서울 등지에서 불러온 전문연희패 출신들로 농악단을 꾸려 경기도를 대표해 ‘경기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했다.

대회에서 최은창이 연행한 판제의 기본은 경기·충청지역에서 주로 연행했던 남사당 풍물판제인 웃다리판제를 바탕으로 했으며, 판의 흥을 돋우는 상쇠놀음, 상모놀음, 무동놀음 등을 적절히 배치하며 평택만의 판을 완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평택농악은 그해 9월 비전동 평택군청 광장에서 시연회를 갖고 10월 20일 공식적으로 결성한 후 10월 29~31일 제주도에서 열린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해 특별상을 받았다.

이 대회에 출전한 단원들은 최은창을 비롯해서 상법고 이돌천, 부쇠 김기복, 법고의 이민조와 김육동 등 모두 32명으로 치배들은 최은창과 절걸립을 함께 하거나 두렁쇠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었으며, 농기를 비롯한 기수와 잡색은 이주상 평택문화원장을 비롯한 문화원 임원들이 맡았다. 연습은 최은창을 총감독으로 해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최은창은 이 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1985년 12월 1일 평택농악 상쇠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을 이끌게 되며, 평생을 풍물꾼으로 또 20여년 가까이 평택농악보존회 회장을 맡아 평택농악을 체계화시키는데 공헌해오다 2002년 5월 31일 작고했다.

최은창은 1997년 한국고음반연구회에서 녹음한 <고사소리>에 8분 27초 분량의 고사반소리를 녹음했고, 이후 평택의 농요 가운데 논메기 소리인 ‘오하, 올러를 가세’와 ‘여기두 하난데’를 녹음했다. 1997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중요무형문화재 평택농악 영상기록> 등 많은 녹음과 영상 기록물을 남겼다.

최은창은 주로 임사남, 유길동, 김일환 등 스님들에게 고사덕담과 절고사의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불교적 형식이 많이 가미돼 있으며, 가사의 양과 내용이 매우 방대하다. 소리는 매우 넓은 음역대로 노래하며, 특히 높은 고음역대를 자유롭게 사용했고 음을 떨어주거나 밀어 올리는 ‘요성’과 ‘추성’ 등의 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구성진 소리가 강점이다. 최은창은 당대 최고의 고사소리꾼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의 사물놀이 공연 레퍼토리의 하나인 비나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최은창은 고사소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자신이 고사소리를 누구보다 잘 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자신의 소리를 통해 여러 사람들이 안정과 위안을 받았으리라 생각했다. 고사소리에 대한 최은창의 애정은 평택농악에서 고사소리 전통을 세우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최은창과 이돌천은 같은 시대의 인물로 평택농악에서 함께 고사소리를 불렀으며 이성호이 뒤를 이어 고사소리를 불렀다. 최은창과 이돌천에서 이성호로 이어지는 평택농악 고사소리 전통은 이성호이 작고 후 조한숙, 황영길, 진두인 등 몇몇 평택농악 전수교육조교와 이수자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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