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김용래 평택농악 명인은
13살 때 두레패 사미로 입문해
남사당과 웃다리 풍물패로 활동하다
2000년 평택농악 예능보유자가 됐다

 

김용래, 1939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쌍용동에서 출생
인척의 권유로 용곡마을 두레패 사미로 웃다리농악에 입문
15살 때 최은창과 인연, 평택을 비롯 인근 풍물꾼들과 걸립
2000년 평택농악 상쇠·무동놀이·법고부문 예능보유자 지정

 

▲ 김용래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예능보유자(1939년~)




Ⅲ. 평택의 예인藝人
3. 농악

■ 김용래金容來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의 유일한 예능보유자인 김용래는 1939년 6월 6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쌍용동 299번지에서 아버지 김남준과 어머니 김금순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악이 너무 좋아 12살 때 천안의 시골 장터에서 벌어지는 난장을 몰래 들어가 보곤 했던 김용래는 13살 때에는 용곡마을로 이주한 후 이웃마을 인척의 권유로 용곡마을 두레패 사미로 웃다리농악에 입문했다.

집안의 4대 독자로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농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1953년 14살 겨울부터는 전문적인 걸립패에 들어가 무동으로 활동했는데 첫 걸립이 안성시 공도면의 소방장비 마련을 위한 소방서 걸립이었고 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 평택농악 오무동 밑동으로 명성을 날린 김용래 예능보유자(가운데)

15살 때에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경찰 유가족 돕기 걸립을 진행했는데 이곳에서 걸립을 마칠 때쯤 평택농악 명인으로 당시 서울 남사당에서 활동하던 최은창이 찾아와 무동과 법고를 잘하니 행중에 참여해 달라는 설득에 넘어가 1954년 최은창과 첫 인연을 맺고 평택을 비롯한 인근지역 풍물꾼들과 함께 걸립을 다니기 시작했다.

16살부터 대전 송순갑 행중에서 2년간을 대전과 공주지역을 돌아다니며 두레굿, 난장굿, 걸립굿을 했고, 또 안성 남운용 행중에서 무동으로 활동했다. 김용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상모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평택농악의 명인으로 같은 천안에 거주하던 이돌천이며, 쇠가락은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이 사사했다.

이 시기에는 난장이나 걸립을 하던 사람들이 부족하다 보니 꼭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라도 지역과 웃다리 지역을 넘나들며 그 지역의 명인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정읍의 전사습, 논산의 김용근, 충북의 민창열을 만나 함께 난장을 하였는데 그 당시 웃다리풍물은 상모의 물채가 나비상 물채였다. 이때 금산의 최상근이 긴 물채를 가져왔는데 난생처음 긴 물채를 구경한 김용래는 그 물채를 빌려와 밤새도록 풀고 다시 조립해 제작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를 계기로 웃다리지역에서도 물채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풍물판제의 화려함과 상모놀음의 다양성, 난이도의 향상 등 웃다리농악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김용래였다.

▲ 평택농악 수법고 김용래 예능보유자(왼쪽)

1956년 17살에는 남사당과 송탄소방서 걸립을, 18살에는 경상남북도를 비롯해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도청 소재지 순회공연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아래 전국적인 전문 연희패들이 남사당이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된다. 이때 풍물뿐만 아니라 안비취, 묵계월 등 소리꾼들과 봉산탈춤, 은율탈춤, 안동하회탈춤도 참여해 전국 순회공연을 진행했으며, 전국 순회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인천공연을 마쳤다.

자유당 말기인 1959년 8월 20일 서울 뚝섬에서 개최된 국산품박람회 공연을 위해 흩어졌던 뜬쇠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는데 행사장 인근에 거처를 잡고 40일을 대기했으나 결국 공연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 기간 장구의 김동현이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김용래는 그가 사용했던 상모를 인계받았다. 동료의 갑작스런 죽음에 슬픔은 컸지만 그의 상모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욱 열심히 연습을 했다. 김용래는 상모를 곧잘 돌렸으나 자신의 상모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 공연에서는 무동놀이의 밑동만 하다가 가끔씩 다른 사람의 상모를 빌려서 공연에 참여했다.

▲ 평택농악 수법고 김용래 예능보유자(왼쪽)

이 시기 김용래의 상모 기술과 밑동 능력은 전국적으로 알아줬는데 남사당과 웃다리지역 풍물패에서 공연과 걸립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수도 없이 받곤 했다. 당시 김용래는 일반 풍물꾼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난이도 높은 기술을 선보였으며, 힘과 균형감각 등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무동놀이 밑동도 거뜬히 해냈다.

1959년 20살 때에는 충청북도 대표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상모잽이 개인상을 받았으며, 그 이후에도 많은 대회에서 단체상과 개인상을 휩쓸면서 김용래는 명실공이 모두가 인정하는 상모잽이로 성장하게 됐다.

김용래는 군대 제대 후 26살 되던 때 다시 유랑생활을 시작했으며, 그해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날이 갈수록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자 결국 풍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애지중지 아끼던 상모를 모두 불태운 후 한동안 농사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뼈 속까지 스며있는 그의 예술적 본능은 걷잡을 수 없었다. 건강이 안 좋아져 원인 모를 병을 앓게 됐고, 풍물소리 환청이 들리기 시작해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부인을 설득해 결국 다시 유랑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김용래는 고사소리도 학습했다. 그의 고사소리 스승은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과 이돌천, 그리고 평택시 안중읍에 거주한 이덕영이다.

이덕영은 김용래보다 20여살 위로 근동近洞에서 고사소리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김용래는 파일난장굿이나 걸립패에서 최은창, 이돌천의 받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용인 한국민속촌이 개촌 하던 1974년 남사당에 참여해 몇 개월 동안 한국민속촌 농악단원으로 활약했다.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하던 김용래는 1982년 평택농악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평택농악 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85년 평택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받는데 공헌을 하였다. 2002년 김용래는 고향인 천안에서 스승을 따라 평택농악의 본 고장인 평택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1990년에 남사당에서 공연제의가 들어와 해외 21개국 순회를 하고 돌아왔다. 이때만 해도 무형문화재 보유단체들이 체계가 잡히지 않은 때인지라 각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연희자들도 타 단체 공연이 있으면 서로들 공연을 다니곤 했었다. 김용래는 특히 전국적으로 불려다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해냈다.

김용래는 전수교육조교를 거친 후 2000년 8월 22일 국가무형문화재 평택농악의 상쇠, 무동놀이, 법고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 황영길 전수교육조교와 함께 고사소리를 하는 김용래 예능보유자

그 당시 평택농악은 최은창이 보존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2002년 5월 31일 최은창의 작고로 그때부터 그가 평택농악보존회 회장으로 16년간 활동해오다 2018년 4월 퇴임했다.

김용래는 수많은 국내외 공연을 통해 평택농악의 세계화와 평택농악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써왔다.

김용래는 웃다리농악의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는 당대 최고의 법고잽이로서 명성을 날렸다. 현재 평택농악 판굿의 앞차기 등 여러 기술을 도입하였고, 사라진 무동놀이를 복원하는데도 앞장서 평택농악이 지금과 같은 원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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