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부터 제대로 알아야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다

 

 

 

 
▲ 김수경/신한고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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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무언가에 이름을 붙일까? 대체로 생김새를 부각하거나 다른 것들과 차별화되는 부분, 혹은 두드러진 특징이 잘 드러나게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하게 표현될 때 우리는 잘 지어진 이름이라고 판단한다.

가령 연한 노란 분홍빛을 띠는 살구색은 과거에 ‘살색’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는 잘 지어진 명칭이 아니다. 살색이라는 단어가 특정한 색만 피부색이라고 정의함으로써 황인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흑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오로지 황인의 입장만 고려하여 단어를 만들었기 때문에 은연중에 흑인의 피부색을 부정했던 셈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살색은 연주황이라는 명칭을 거쳐 현재의 ‘살구색’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단어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던 우리 사회의 인식 또한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이 명명의 중요성이다. 즉,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지칭하는 이름은 그것을 가리켜 나타내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하며 나아가 당대 사회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된다.

위안부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숨기기 위해 완곡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찾아 피해자들에게 선사한 것이 바로 ‘위안부’다. 이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일본군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위안하는 여성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위안부는 순결을 잃은 여자라는 인식을 통해 피해자들을 비하함으로써 그들을 일반 사람들과 구별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 사용되었던 ‘정신대’ ‘종군 위안부’라는 이름에서 거듭된 수정을 거친 후 현재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정식명칭이 되었다. 이 명칭은 진실을 왜곡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위안부라는 말이 일본군 문서에서 직접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범죄를 고발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위안부에 작은따옴표를 붙여 위안부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흔적들을 살펴보았을 때, 일본이 지은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서 처음부터 그들에게 올바른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던 것은 과거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너그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위안부였다는 사실은 멸시의 눈초리를 받는 타당한 명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해방 후에도 할머니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비난과 지탄 속에서 침묵했고 그들의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상처도 깊어졌다. 똑같은 고통과 억압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해방을 바랐던 우리가, 광복 후 그들을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구원자가 나타났을 때 그가 내밀어 준 손을 선뜻 잡을 용기조차 빼앗아 갔다. 과연 오직 일본군만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범인인지, 우리가 벼랑 언저리에 있던 소녀들을 그 끝으로 내몰았지만 그림자에 가려져 버린 또 다른 가해자가 아닌지, 그들을 외면했던 우리의 책임 또한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현재, 사람들은 그들이 겪은 아픔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흐름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기본적인 일본군 ‘위안부’의 정확한 표기법은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지칭하는 올바른 명칭부터 제대로 알아야 비로소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다. 과거를 왜곡하지 않고 그들의 상황을 거짓 없이 드러내는 이름을 칭하는 것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을 올바르게 부르는 것, 일본군 ‘위안부’로 부르는 것. 그것이 그들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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