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4월 26일

농사철에 순사가 저수보 물 빼버려
유천리 道에 진정, 안성군은 무심

 

 

 

“기보-순사가 저수보(貯水洑)를 절단하여 농시에 물을 빼어 버려서 농민들은 크게 낭패하였다 거니와 이에 대하여 안성군 당국(安城郡當局)에서는 방관적 태도를 취하므로 이에 분개한 동민(洞民)들은 군 당국의 처리를 기다릴 수 없다고 중보리 유천리(中洑里 柳川里) 양 동리에서 대표 九인(九人)을 선발하여 지난 二六일 경기도에 진정하여 도 경찰부에서는 현장을 조사하였고, 진위군 농회(振威郡 農會)에서는 발동기(發動機)를 이용하여 급수(汲水)하여 준다는데, 안성군 당국에서만 아무런 처치가 없음으로 중보리(中洑里)에서는 우리도 안성군 당국에 진정(陳情)하여 농역(農役)의 준비를 하여야겠다고 준비 중이라 한다.”(『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 2일)

보洑는 하천에서 관개용수를 수로에 끌어들이려고 둑을 쌓아 만든 저수시설로 평택처럼 논농사를 주로 하는 지역에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설이다. 더욱이 봄 농사철에는 물이 중요한 요소다. 때문에 모내기를 준비하기 위해 겨우내 보에 물을 가득 채워놓는다. 그런데 한 순사가 물을 담아둔 보를 터트린 사고가 일어났다. 1935년 4월 중순, 안성천에 있는 보를 터트린 것이다. 이로 인해 모내기를 앞두고 있던 농민들은 그야말로 황당한 일을 맞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성군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농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국의 조치를 기다리가 지친 평택의 중보리中洑里(현 안성시 공도읍 중복리)와 유천리柳川里(현 유천동) 주민들은 대표 9명을 선정해 1935년 4월 26일 경기도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직원을 파견하여 현장을 조사하는 등 야단법석이었다. 당시 진위군농회는 발동기를 동원해 물을 공급하는 등 대민처리에 분주하였다. 그럼에도 안성군 당국은 여전히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무사인일하게 대응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중보리 주민들은 농사일에 지장이 없도록 안성군 당국에 진성을 하기로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주민들의 힘은 생활정치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유천리와 중보리는 평택과 안성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두 마을이었지만, 평택지역이 보다 적극적으로 주민들을 위해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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