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어린이와 부모가
아름다운 동요를
함께 부르면
그만큼 우리 사회도
밝아질 것이다

 

▲ 최현규 작곡가
동요 ‘노을’

지난 8월 17일 토요일 평택시남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6회 노을동요제가 성황리에 끝났다.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오른 독창, 중창 등 15팀의 열띤 경합 끝에 ‘노을아 노올아’라는 예쁘고도 신나는 창작동요를 부른 아이리스중창단이 영광의 대상을 받았다. 대상을 받은 곡뿐만 아니라 본선에 오른 다른 동요들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참신하고도 아름다운 좋은 곡들이었다. 풍성하고도 세련된 감각의 새로운 동요들을 들으면서 동요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서 감개가 무량했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인 창작동요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가 1920년대 초반이니 이제 거의 100년이 되어간다.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이 일본 동요를 그대로 부르는 것을 안타까워한 윤극영 등의 선구자들이 ‘반달’, ‘오빠생각’, ‘설날’ 등을 만들어 보급한 것이 시초가 됐다. 오늘날에도 널리 불리어지는 바로 그 노래들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지금 그 손자 혹은 손자의 아이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는 셈이다. 동요는 이렇게 세대의 역사를 이어주는 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대중문화의 범람 때문이랄까? 요즘 어린이들에게서 동요가 사라지고 있다. 동요 대신 어른들의 노래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잘 알겠지만, 어린이들은 성장하는 동안 각 연령대에 맞는 정서와 활동이 따로 있다. 그렇기에 어린이가 단계를 뛰어넘는 교육을 받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모든 음악은 기본적으로 감정과 정서를 수반한다. 아이들에게 지능 발달도 중요한 것은 틀림없다만, 정서의 발달 또한 그만큼 혹은 그 이상 중요하다. 인생을 살아가며 행복을 느끼고 성공하는 자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IQ 지능지수’보다는 ‘EQ 감성지수’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좋은 감정과 정서를 많이 경험할수록 EQ가 높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꼭 프로이트나 피아제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 사람의 내면을 평생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말이다. 마치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요는 어린이들에게 긍정적 정서와 경험을 심어주는 최적의 도구다. 선율도 그렇거니와 노랫말이 어린이들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동요의 노랫말은 어린이다운 순수함,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력, 활력, 아름다운 서정, 배려하고 함께하는 사회, 부모님에 대한 감사 등등 긍정적 정서가 듬뿍 들어간, 말하자면 어린이들의 정신 보양식이다. 험악한 언어를 사용하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에너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의 뇌는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한다. 예를 들어 젊음이나 활력 등을 의미하는 단어를 듣게 되면 우리 몸은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움직이게 되고, 그 반대로 늙음이나 무기력 등의 단어를 듣는 경우 우리 몸도 느리게 움직인다. 때문에 부정적 단어로 가득한 노래들을 어린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듣게 혹은 부르게 하는 것은 참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모든 것은 습관으로부터 비롯한다. 동요 또한 그렇다. 아이가 동요를 부르는 경험은 아이에게 평생 좋은 기억과 정서로 남게 된다. 특히 부모와 함께라면 더욱 좋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모를 가르치는 스승’일 수도 있다.

동요를 부르는 어린이들의 구김살 없는 환한 얼굴이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속 떠올라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우리나라 모든 어린이는 물론 부모들까지 아름다운 동요를 함께 부르는 세상을 꿈꿔 본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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