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6월 24일

폐병 비관, 치료하러 서울로 가
칼로 찔러 자살하려다 구사일생

 

   
 

“경기도 진위군 북면 계곡리(京畿道 振威郡 北面 桂谷里) 삼백팔 번지에 본적을 두고 그의 신병을 고치려 경성부 내에 와있던 양주익(梁柱益, 四三)은 이십사일 오전 세 시에 시내 남미창정(南米倉町) 팔십사 번지 이윤해(李允海)의 집에서 조그마한 양도(洋刀)로 하복부(下腹部)를 여섯 군데와 목을 두 곳이나 찔러서 자살하고자 하였는데, 그래도 목적을 달치 못하지 못하고 그대로 뛰어 나와서 어성정(御成町) 백오십 번지 앞 우물에 뛰어들었더니, 물이 얕아서 할 일 없이 다시 기어 나오다가 한 시간 반이나 지난 네 시 반에 마침 그곳을 순시하던 남대문파출소의 순사에게 발견되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라는데, 상처는 대단치 않아서 생명에는 관계없으리라 하며 자살코자 한 원인은 폐병을 고치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그리한 것이라더라.”(『조선중앙일보』 1927년 6월 25일)

폐병은 일반적으로 결핵結核이라고 한다. 한때 결핵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질병 중의 하나였다. 1920년대만 해도 지금처럼 치료약의 부족하거나 효능이 떨어져 죽음에 이르는 사례가 많았다.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도 결핵에 걸려 요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팽, 데카르트, 칸트 등도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처럼 무서운 전염병으로 알려진 폐병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기사가 1920년대 하루가 멀다고 신문에 실리기도 하였다. 1929년 한 신문에 의하면 당시 인구 2천만명 중 3백만명이 결핵환자였다고 할 정도였으며, 매해 5만명 정도가 폐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27년 중반 평택에서 폐병을 앓던 환자가 서울로 치료받으러 갔다가 비관하고 자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진위군 북면 가곡리에 사는 40대 초반 양주익은 오랫동안 폐병을 앓아 왔다. 용하다는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서울로 가서 병을 고치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자살을 기도하였다. 양도洋刀 즉 나이프로 자신의 하복부 여섯 군데와 목 두 군데를 찔렀지만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 한 우물로 뛰어 들었지만 너무 얕아서 무위로 끝났다. 다시 한 번 죽으려고 밖으로 기어 나오던 중 순찰 중이던 경찰에 발견되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끈질긴 것이 목숨인지라 양주익은 다행이 큰 화를 입지 않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옛날 말에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살아나는 경우가 있는데, 양주익에 해당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장수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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