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지만
동시에 21세기 지구촌 사회의
세계시민이기도 하다

 

 
▲ 이승빈/신한고 2학년
jenny1399@naver.com

‘기부’를 하는 행위는 그것이 마음이든, 노동력이든, 물질이든 선한 의도에 따라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다양한 기부활동을 하며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부행위에 대해 자국민에게 더 집중해야 하는지, 해외의 빈곤층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를 두고서는 확실한 장담을 내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먼저 이러한 고민을 ‘생명’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면 도움을 주어야 하는 국가, 그 대상에 따라 말이 달라질 것이다. 아프리카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숨을 쉬는 단 5초의 시간 동안에도 아이 한 명이 숨을 거두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고 그들에게 ‘기부’란 생명 연장의 일종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사’라는 단어가 한국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도 복지의 사각지대에 갇힌 탈북민 모자가 아사한 사건 때문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 중에도 배고프고, 힘든 이들이 많은데 누구를 걱정하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우리는 힘든 자국민이 얼마만큼 없어져야 외국인을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빠진다. 국내에 힘든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외국을 도울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도 기초수급자, 장애인, 미혼모, 독거노인, 아동학대 피해아동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어질까? 우리나라 사람부터 돕자는 사람들도 국내에 힘든 사람이 완전히 없어진 이후에 외국을 돕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정도” 없어지고 나서 돕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어느 정도”의 수치는 얼마나 되어야 할까? 국내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는 다른 나라 사람은 돕지 말자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21세기 지구촌 사회의 세계시민이기도 하다. 과거 일제강점기, 6.25 한국전쟁 등 뼈아픈 시련과 역사를 간직한 우리 민족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들 스스로의 끈질기고 독한 자생능력도 있었겠지만, 외국의 막대한 원조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뜨거운 여름날 하루 종일 폐지를 줍고 번 돈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할머니도, 비행기를 타고 수 시간을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에서 내전과 질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시체 산’도 무시하면 안 된다. 부디 우리 모두가 자국과 외국 모두 범세계적인 마음가짐으로 돌볼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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