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12월 11일

가천리 사람, 도일리 17세 소년 끌고가
찾으러 간 도일리 마을 사람과 패싸움

 

 

“본월 십륙일 오전 십일시경에 경기도 진위군 인탄면 도일리(京畿道 振威郡 仁炭面 道日里) 농민 약 삼십 명과 안성군 원곡면 상하가천리(安城郡 元谷面 上下佳川里) 농민 약 육십 명 간에 한 시간이나 서로 큰 싸움이 일어났었는데, 처음 가천리의 사람이 도일리의 십칠세 된 소년 한 명을 끌어가므로 찾아오고자 한 일과 농기의 순서 다툼으로 분쟁이 된 바, 도일리의 사람은 그 수효가 적은 까닭에 중과부적으로 중상이 한 명, 경상자가 여섯 명을 내었는데, 소관 관헌이 출장하여 해산케 하였고, 수원지청으로부터 십칠일 예심판사와 및 검사는 서기를 따라 현장에 출장하여 가해 관계자 십여 명을 인치하여 엄중 취조 중이라더라.”(『매일신보』 1917년 7월 23일)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약간 산 중턱에 살았던 관계로 읍내로 가려면 아랫마을을 지나가야 한다. 그럴 때면 가끔 눈치를 보곤 했다. 별 탈 없이 지내기도 했지만 때로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패싸움을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아랫마을을 지나는 것이 매우 두려웠다. 혹시 지나갈 때 나에게 해코지하지 않을까 하는 무언의 공포로 인해 긴장감을 세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문화에 두레싸움이라는 것이 있다. 마을 간에 두레기를 빼앗으려고 싸움을 벌이기도 하는데, 때로는 감정이 격해 마을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한다. 두레싸움이야 마을의 자긍심을 지키려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이유로 인해 마을싸움을 하는 것이다. 1917년 7월 16일 평택의 도일리와 안성의 가천리 마을 사람들 간의 집단 패싸움이 벌어졌다. 아마도 지역적 감정이 살짝 드러나 보이는 싸움으로 추정된다.

싸움의 원인은 도일리의 17살 된 한 청년을 가천리 주민들이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이는 직업적인 싸움의 발단이었지만 두 마을은 이웃으로 경계를 하고 있음에도 평소 농기農旗 즉 두레기에 대한 분쟁이 늘 상존하고 있었다. 이 17세 청년의 납치사건(?)으로 마을끼리 집단 패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도일리에서는 30여 명이, 가천리에서는 60여 명이 마을싸움에 나서 7월 16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1시간 정도 싸움이 이어졌다. 숫자가 부족한 도일리 마을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게 되었으며, 1명의 중상자와 6명의 경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크게 피해를 입었다. 두 마을이 싸운다는 소식을 들은 평택경찰서는 곧 바로 현지로 경찰을 파견하여 그나마 싸움이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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