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영화를 보았습니다. 평소에도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지만 특히 요즘에는 주말을 이용한 조조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평상시에 보면 보통 1만원이 넘는 경우가 많은데 조조영화는 7천원으로 영화를 볼 수 있고 무엇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마치 내 집에서 보는 것처럼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는 그 넓은 영화관을 혼자 차지하고 보다가 어찌나 슬프던지 집에서 보는 것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주책이라며 흉보는 사람이 없어 그것도 좋았습니다.

며칠 전, 기대 없이 갔다가 그만 가슴이 먹먹해져서 돌아온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 ‘베트맨’에 등장하는 악당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어 돌아온 영화 <조커>입니다. “난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비극적인 순간에도 웃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졌습니다. 울부짖는 주인공의 목소리에서는 하루하루 광대의 숙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과, 제도와 이념과 불신과 자본을 등에 업고 마치 코미디처럼 미쳐가는 세상에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 진짜 미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조금만 눈을 돌려도 주인공처럼 슬퍼도 웃어야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오히려 비웃고 외면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말처럼 진심을 담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작은 선동에도 이념으로 갈라져 부딪치고, 서로 때리고 죽이면서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정말로 힘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버리기 일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커를 살인자나 괴물이라고 부르지만 영화는 그런 괴물이나 살인자를 과연 누가 만들어내는가에 집중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는 자식이 학대당하는 현장에서 방관자가 되고, 가난은 대물림 되고, 약자들을 돌보는 사회적 제도는 끊겨버립니다. 가진 자들은 없는 자에게 더욱 가혹하게 굴고, 정말 아이러니인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듯 죽고 싶다고 생각한 최악의 날에 평생을 염원하던 희소식은 들려옵니다.

같은 계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들을 대변하라며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지만 결국 영웅은 사람 사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립니다. 희디 흰 벽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정신병원에서 그는 왜 그랬는지 이야기해 달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처럼 들리는 대사입니다.

빈민가에서 서른의 나이가 되도록 착하게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던 청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고 가진 것을 빼앗기면서도 “그냥 줄걸 그랬어”라고 말하던 그 착한 청년을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코미디언이 되는 꿈을 꾸며 노트에 꿈을 적어 내려가던 사람입니다. 동료를 살해한 현장에서 키 작은 한 동료만은 살해하지 않고 문까지 열어 보내주다가 문득 그의 이마에 입맞춤까지 하며 던진 말이 영화가 끝난 지금까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돕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은 너 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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