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씨앗에는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씨앗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쭉정이와는 차별되는 것입니다. 씨앗 속에 담긴 새로운 생명은 어떤 형태로 자랄지 알 수 없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발현하게 될 씨앗 속 생명들은 그 찬란한 순간이 오기까지 가능성을 안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좋은 결실을 맺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결실을 맺기도 전에 죽기도 합니다. 똑같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씨앗인데도 이렇게 각기 다른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씨앗이 심겨질 환경 때문입니다. 즉, 씨앗이 떨어진 곳이 좋은 토양인지, 햇볕과 바람은 잘 드는 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토양, 물, 바람, 햇볕 등 씨앗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어느 정도 자란 후 맞이하게 될 비바람이나 폭염, 태풍 등을 견디는 것은 오롯이 씨앗의 몫이겠지만 그전까지는 환경이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좋은 환경이 우선이고 그 다음 자신의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을 이루는 것은 수억만 분의 일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정이 됩니다. 즉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모든 생명은 가장 선택된 씨앗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세상에 나와 살아가는 모습은 모두 다릅니다. 그것은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처해진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노력은 그 다음인 것이지요.

그러니 현재 처해진 상황만을 두고 “너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라고 말하거나 “더 열심히 노력해봐”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전쟁국가에서 태어났다면 그곳에서는 제대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고 단순히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씨앗에게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잘 성장시키고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려운 가정에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환경에 짓눌리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많은 사회적 제도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도 분명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 속에서 자립할 수 있다면 이후부터 비바람과 폭염과 태풍 등의 굴곡을 견디거나 극복해내는 것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온 환경은 무시한 채 오롯이 너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환경이 갖춰져 있지 못하면 잘 자랄 수 없을 테니까요.

만일, 어려운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아직 이 사회에서 꿋꿋이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특별해야 합니다. 바위를 뚫고 해풍을 이겨내며 자란 소나무에 가격을 매길 수 없듯이, 그 소나무의 굽은 허리를 우리가 감탄의 눈길로 위대하게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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