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막바지에 이르러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강천산엘 다녀왔습니다. 지난 비에 단풍이 다 떨어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 울긋불긋 남아있는 아기단풍이 참으로 곱디고왔습니다. 많은 등산객이 가을의 마지막 절정을 보기 위해 정상으로 향했지만, 산을 오르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고 즐기는데 익숙한 나는 초입만 잠시 걷고는 그 자리에 눌러앉아 오가는 사람들이며 주변의 고운 나뭇잎들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줄기 폭포도 수려했지만 내 눈에는 높은 곳에서 멋지게 떨어지는 폭포보다 그 옆에 심어진 작은 감나무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나무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주황색 감두 개가 남아있었거든요. 아마도 배고픈 새가 날아오면 그 감으로 배를 채우고 폭포에서 떨어진 물로 목을 축일 수 있겠지요.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지만 우리 마음에도 까치밥 몇 개 남겨두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우리에게 주는 특별함이 있지만 그중 특히 봄과 가을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안겨줍니다. 인간 말고도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봄이라면, 세상의 모든 생명의 존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가을입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이 뛰고, 가을이 되면 저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나 봅니다.

자고로 선물은 그것을 풀어보고 감동해야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선물을 준 상대의 마음을 느껴야 의미까지 간직하게 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도 자연이 왜 우리에게 그런 선물을 주었는지 생각해보고 내 것으로 느낄 수 있어야 자연을 귀하게 여길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연이 주는 선물의 의미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울긋불긋 단풍을 보며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는 자연의 의미를 더 크게 깨닫기 어렵습니다.

나무가 가장 화려한 모습을 선보이는 절정의 계절은 바로 가을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나무들은 하나둘 아름답게 물든 잎을 내려놓고 혹독한 계절을 맞이하겠지요. 나무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단풍잎을 끌어안고 있지 않을 것이며, 혹독한 계절이 다가온다고 미리 단풍잎을 놓아버리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계절에 순응하며 화려한 잎을 스스로 내려놓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찬바람 앞에 당당히 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을 나무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토록 혹독한 찬바람을 묵묵히 견디면서도 내면에서는 연한 싹을 잉태할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 봄, 때를 기다려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올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준비를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침묵하며 인내할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이어지는 길목에 앉아 오늘은 저만치 서 있는 뜨겁게 붉은 단풍을 봅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작은 단풍나무는 사람보다 성숙하고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저 여린 나무 어디에 그런 강인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이라도 자연이 준 선물을 열어보았으니 이제는 가을을 보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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