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추위가 몰아치던 때에 견주면 요 며칠은 황송해야 할 지경이지만 겨울은 엄연하다. 여전히 금광호수는 얼어있고, 그늘 진 곳엔 잔설이 파랗게 빛난다. 영하로 떨어진 날들이 흘러간다. 햇볕은 짧은 낮 동안 머물다 간다. 겨울의 날들에 우울감이 잦은 것은 일조량이 줄고, 일조량이 준 딱 그만큼 행복의 부피도 준 탓이다.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골목길을 걸어갈 때 문득 내 안의 어둠들을 만져본 느낌이다. 내 안의 어둠은 불행이라는 먼지들이 뭉쳐 만들어진 구름의 촉감을 가졌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쓸어본다. 세상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있고, 이미 태어나서 눈썰매장에서 환호하며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이 있다. 겨울은 그 사이에 머문다. 오늘 하늘은 잿빛으로 흐리고, 눈발 몇 점이 흩날리다 멈춘다. 나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와 스산한 마음을 견디며 희미해진 행복의 기미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혼자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졸시, ‘명자나무’

겨울저녁은 빨리 오고, 닭은 어둠이 내리자마자 횃대에 올라간다. 겨울저녁이 어둠 두 필을 안고 찾아올 때 나는 발 없는 새처럼 난감하다. 그런 난감함을 견디며 ‘명자나무’ 같은 시를 썼을 것이다. 발이 없으니 땅에 내려앉을 수가 없는 새의 막막함을 알 듯도 하다. 겨우내 심해어처럼 실내에서 칩거한다. 실내에서 찻물이나 끓이고 뜨거운 차를 마시며 내 마음의 온도를 가늠한다. “석류는 네 근심을 삼켜 붉고/네 것도 내 것도 아닌 울음을 먹고/대추는 다닥다닥.//내 발등 부기가 좀 가라앉았다고/가을 몇 개가 추락하고/겨울 저녁은 어둠 두 필을 안고/건너온다.//다시 봄 뜰엔 모란 작약이 피고,/가을 공중엔 매가 날겠지.//이만하면 별 보람 없어도/살만 하지 아니한가?/내년에도/살아봐야겠다.”(졸시, ‘늠름하게’) 겨울의 실내에서 마음의 온도를 스스로 높이며 이런 시(詩)도 끼적이는 것이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몸통 속엔 수많은 잎눈과 꽃눈들이 숨어 있다. 봄이 오면 그것들은 일제히 몸통 바깥으로 밀려나와 초록 잎의 광도(光度)로 세상을 빛나게 한다. 아, 겨울은 지루해. 정말 지루해. 그러나 칼은 불의 단련 속에서 강해지고, 사람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 인격이 굳세어진다. 나는 자식들에게 집과 땅을 남겨주지 않을 테다. 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소박함에 처할 줄 아는 고아함, 책을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취향, 우정을 금보다 더 귀히 여기는 인격의 꿋꿋함, 그리고 혹한이 몰아치는 겨울의 시련과 역경을 조용히 견디는 지혜. 그게 내 자식들에게 남길 유산(遺産)이다.

오늘은 점심으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고등어 한 마리를 구워 혼자 밥을 먹었다. 오후엔 이불 홑청을 벗겨 빨아 널었다. 이불 홑청은 빨랫줄 위에서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빨래가 금세 어는 것을 보니 겨울은 겨울이다. 이불 홑청을 널고 난 뒤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5번을 들었다. 귀가 호사를 누리는 동안 잠시 나른한 햇빛 같이 행복이 머물다 갔다. 행복은 “덧없다”. 그것이 덧없는 것은 사람이 본질에서 나약한 탓이다. 행복은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철학자는 장 자크 루소다. 행복이 타인을 필요로 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루소의 말에 덧붙여 토도로프는 이렇게 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필요로 하고, 이 타고난 불완전함이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한다.” 행복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어서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저 멀리 달아난다. 행복을 전달하는 타인이란 언제나 변화에 취약하고(그는 나이를 먹고 늙거나 어디론가 떠난다. 마침내 죽는다.), 그에 따라 사랑은 곧 소멸한다. 행복은 깨지고 쉽고 덧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숭고하다. 앞으로도 2700번은 더 겨울저녁을 맞게 될 것이다. 눈발이 날리고 물들이 꽝꽝 얼어붙는 겨울저녁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리 모두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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