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는
평택의 후예들이 만든 독립군 양성학교

 

황원섭, 만석의 재산 처분해 독립운동에 쓴 이석영 조명 필요
성주현, 진위면 가곡1리는 가오실마을로 평택과 관련 있어
김해규, 이석영에게 상속된 진위 땅이 신흥무관학교 자금으로
박성복, 이석영 체계적 선양 지금부터 조명·연구 진행되어야

 

2019년 평택학학술대회가 12월 7일 진위면 견산리 진위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이석영·이회영 6형제의 민족운동과 평택’이라는 주제로 학계 전문가들이 모인 이날 학술대회는 평택문화원과 우당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특히 이날 학술대회가 열린 공간서는 <평택시사신문> 주관으로 신문 보도 내용과 취재 사진 전시회가 열린 참석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김은호 평택문화원장은 “이석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며,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평택시사신문>이 특별취재로 뜻깊은 일을 했다. 오늘도 의미있는 학술대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평택시사신문>은 이날 학술대회를 지상 중계하고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이석영의 삶을 통해 평택지역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방안에 대해 시민들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조성운 강사
동국대학교

■ 토론사회
조성운 강사/동국대학교

오늘 이 자리는 평택학을 정립하기 위한 학술대회다. 이제는 이석영에 대한 관심도 많고 평택시와 남양주시에서도 선양사업을 하고 있으나 아직 이석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오늘 이 자리가 평택학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 황원섭 상임이사
우당기념사업회

■ 기조발제1
경주이씨 우당 이회영 6형제의
가계와 독립운동

황원섭 상임이사/우당기념사업회

우당 6형제는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생명과 재선을 바쳐 전력투구해서 지도자의 사명과 책임을 다한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우당은 6형제의 가족회의 결의에 따라 전 가족 등 60여 명이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독립운동자금 40만 원을 가지고 12월 압록강을 건너 망명했으나 사실 이 자금은 대부분 이석영이 영의정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상속받은 재산을 헐값으로 처분한 것이다. 이석영은 이회영의 그늘에 가려져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만석의 재산을 처분해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조명돼야 한다. 특히 자신의 재산을 독립투쟁에 바친 대가로 스스로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역사에서 조명돼야 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에 걸쳐 3500여 명의 독립군 장교를 배출했고 이들이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의 핵심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평택의 후예’들이 만든 독립군 양성학교라는 상징성이 있다. 경주이씨 우당 6형제에 대한 독립운동 이야기가 평택인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규정하고 평택학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성주현 책임연구원
경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 기조발제2
이석영과 만주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한 고찰

성주현 책임연구원/경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이석영이 양자로 입적한 이유원은 ‘가오실 대신’으로 불렸는데 이는 평택시 진위면 가곡1리의 가오실마을에서 유래됐다고 본다면 이석영 또한 ‘가오실’ 내지 ‘평택’과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석영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할 때 평택의 경주이씨 문중의 토지도 상당 부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서간도 시종기>에 의하면 이석영은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합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수용할 줄도 아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독자적으로 민족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동생 이회영이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자신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의 성격이 때로는 과단성 있음을 보여준다. 이석영은 1만여 석의 재산과 가옥을 방매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흔쾌히 제공했고, 경주이씨 문중에 있는 평택의 땅도 일부 처분했다. 이석영은 한인자치단체인 경학사 조직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 설립과 유지에 자신의 재산을 쾌척했고 만주에서 활동하는 민족운동가와 신흥강습소 학생들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석영에게 있어 만주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이것은 바로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이석영에 관한 연구와 평가는 아직 미흡하다. 그가 남긴 글이나 자료가 부족하다는 한계 때문이다. 평택과의 직접 관련성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경주이씨 세장지’와 ‘가오실’이라는 것이 평택과 간접적으로 관련 있음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그의 삶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 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 기조발제3
경주이씨 6형제와 평택지역

김해규 소장/평택지역문화연구소

평택지역 경주이씨는 상서공파의 6대조 이승이 진위면 동천리로 낙향한 이래 진위면 마산2리 수촌마을로 분동됐고, 조선 후기에는 백사공파의 후손 이세필이 낙향하면서 진위면 봉남3리 아곡마을과 가곡1리, 지산동 동막마을로 세거지가 확장됐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이석영을 양자로 들이면서 정동의 99칸 집과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의 별서와 전답, 그리고 이정좌로부터 전승된 평택시 진위면 가곡1리 일대를 상속받았다. 평택지역 땅 중에서 진위면 동천리 일원의 경주이씨 상서공파 종중산과 종중답은 매각할 수 없었고, 이세필과 이태좌로부터 상속된 진위면 봉남3리 아곡마을 일대는 이유승의 첫째 아들 이건영에게 상속됐으나 종중 땅이었기 때문에 매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위면 가곡1리 장토는 이정좌로부터 상속된 재산으로 이정좌로부터 이유원을 거쳐 이석영에게 상속돼 매각할 수 있었다. 이 재산들은 이유원의 서자 이호영이 상속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석영이 상속받아 독립운동자금 조성과정에서 같은 마을 제주 고씨에게 매각됐다. 이렇게 조성된 자금은 만주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사용됐다.


 

▲ 박성복 연구위원
평택향토사연구소

■ 기조발제4
경주이씨 이석영과 6형제의
인물 콘텐츠화 방안

박성복 연구위원/평택향토사연구소

이석영을 체계적으로 선양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그를 조명하고 연구하는 사업을 착실하게 진행해야 한다. 조사, 발굴, 학술연구를 통해 선양사업의 기초를 탄탄하게 해야 한다. 신흥무관학교를 콘텐츠화하기 위해서는 평택시무봉산청소년수련원과 연계해 전성기의 신흥무관학교 일부 시설을 복원하고, 이를 청소년 교육에 활용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국내외 답사코스 개발도 필요하다. 2021년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지 110년이 되는 해로서 2년 후를 대비해 각종 선양사업을 준비하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평택시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도시’로 선언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이후 ‘노블레스 오블리주상 제정’과 시상, 진위면 봉남리를 거점으로 ‘이석영 노블레스 오블리주 길’ 지정, ‘이석영 노블레스 오블리주 장학재단’ 운영 등의 사업을 제안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양을 위한 사업으로는 ‘독립운동가 이석영기념사업회’ 설립을 최우선으로 시행해야 한다. 또한, 찾을 수 없는 유해를 대신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우리 정부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이석영과 관련 있는 평택시-남양주시-우당이회영기념관-경주이씨대종회-육군사관학교가 결연하고 학술연구와 선양프로그램 진행, 추모제 등 공동 선양사업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날 평택학학술토론회 기조발제에 이어 ▲김일 은혜중학교 교사 ▲정혜경 서울시문화재위원회 위원 ▲장연환 효명고등학교 교사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가 토론에 나섰다.

 

▲ 김일 교사/은혜중학교
▲ 정혜경 위원/서울시문화재위원회
▲ 장연환 교사/효명고등학교
▲ 황수근 학예연구사/평택문화원



 

 


정리/임 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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