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로 알려진
심복사 불상이 고려 초로
다시 편년되었다
연구를 통해 새롭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 황수근 학예연구사
평택문화원

얼마 전 자료를 수집하다가 우리지역과 관련된 논문을 찾게 되었다. 최성은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쓴 ‘평택 심복사深福寺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으로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편년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심복사와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해서는 심복사의 창건설화를 중심으로 설명해왔다. 창건설화는 고려 말 파주 문산포에 살던 천 씨와 박 씨, 문 씨 등 세 어부가 현덕면 앞바다에서 불상을 건져냈으나 절을 세울 재료가 없었는데, 꿈속에서 나타난 부처님의 계시로 바닷가에서 주인 없는 검은 소와 파손된 배를 찾게 되었고 이 재목으로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창건설화를 제외하고는 문헌기록이 적고 고고학적 발굴자료도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절과 불상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비롯해 <평택시사>에서도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10세기 통일신라 후기로 편년하고 창건설화를 기술하는 정도로 정리돼 있다. 하지만 이 논문에는 심복사와 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연구했다.

“서해안 진출을 위한 수륙교통로상의 평택지역 위치와 심복사 주변의 덕목리성과 연관 지어 덕목리성 주변에 인구가 집중되고 치소로서의 성격이 수륙교통로 상에 위치한 이 지역에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한 사찰의 건립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비로자나불상의 전통을 이은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금강정경계 밀교도상에 나오는 비로자나불 상의 7사자 대좌와는 달리 쌍사자 대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기존에 알려져 왔던 밀교도상의 고려적 변용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양식적인 면에서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상호에서 현실 속의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와 유사한 상호는 오늘날의 경기도 안성과 여주, 강원도 원주, 홍천, 강릉 일대의 중부지역 나말여초 불상들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표현이다. 이 지역들은 나말여초기 태봉의 지배 아래 놓였던 곳이므로 심복사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된 평택지역에도 태봉의 불교문화와 조각의 전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심복사 비로자나불상의 착의형식이나 문양의 표현에서는 신라하대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나말여초기 조각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양식화가 진행되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점이 드러난다. 특히, 대좌 중대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나말여초 일부 석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심복사 대좌에서도 그대로 보이고 연판의 문양이나 귀꽃의 처리에 있어서도 고려조각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어 그 조성시기는 고려 10세기 후반으로 편년이 가능할 것이다”

이 논문에 드러난 것처럼 기존의 통일신라로 알려진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고려 초로 다시 편년되었다. 이처럼 기존의 정리됐던 부분이라도 다시 연구되면 새롭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사례를 볼 때 비단 지정된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지정되지 않은 문화유산, 무형의 문화유산, 삶의 문화유산 역시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보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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