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작곡가에게 의뢰해
다시 작곡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가사를
폐기하는 것은 반대한다

 

 
▲ 김해규 소장
평택지역문화연구소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다. 그런데도 아직 ‘친일잔재청산’이 중요한 화두話頭인 것을 보면 친일잔재의 뿌리가 깊고도 넓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 지역에도 친일잔재는 무수히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자 문제는 제기조차 못 하고 있고, 임종상이나 해평 윤씨 집안 친일파들의 땅도 곳곳에 널려 있다. 몇 년 전부터 논란이 되는 ‘평택애향가’ 문제도 그 가운데 하나다.

‘평택애향가’는 1970년대 작곡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각 시·군에서 애향가를 만들 때 평택군에서도 유달영 서울대학교 교수와 작곡가 이홍열 씨에게 의뢰해 곡曲을 만들었다. 그동안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불렸던 ‘평택애향가’가 십여 년 전부터 논란이 제기돼 지역사회의 화두가 되었고, 급기야 올해 평택시가 새롭게 작사·작곡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에 기생하며 유명세를 치른 친일작곡가의 곡을 폐기하고, 평택지역의 역사적 정체성과 자긍심, 정서를 담은 새로운 애향가를 만들려는 평택시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바로 ‘작사作詞’ 문제다.

우리가 그동안 문제를 제기한 것은 작사가 아니라 ‘작곡作曲’의 문제였다. ‘바우고개’, ‘꽃구름 속에’와 같은 주옥같은 가곡을 만든 작곡가 이홍렬이 사실은 민족적 양심을 팔고 적극적인 친일을 했던 인물이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평택애향가’를 작곡한 인물이 일제 말 친일어용단체 ‘국민총력연맹’ 산하의 ‘국민가창운동정신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반국가(반일적)적 음악을 축출하고 옹위한 일본음악을 수립하겠다’는 친일음악운동을 전개하고도, 파렴치하게 해방 후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립하고 ‘3·1절 기념야외음악회’를 개최했으며 문교부예술위원, 서울시문화위원이 되어 우리나라 근대음악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작곡가의 곡을 ‘애향가’로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 문제다.

그런데 평택시는 문제가 되는 작곡뿐 아니라 멀쩡한 작사까지 바꾸려고 한다. 필자는 이것에 반대한다. 반대의 이유는 작사가 유달영이라는 인물이 특별한 흠이 없는 훌륭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유달영(1911~2004)은 일제강점기 현재의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의 전신인 서울고농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 돌아온 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과 함께 브나로드운동을 펼쳤던 계몽운동가였다. 일제 말 ‘성서조선’ 사건으로 김교신, 함석헌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부임한 뒤에는 우리나라 농학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고, 덴마크와 같은 복지농촌을 만들기 위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으며, 후학을 양성해 농학 발전의 토대를 세웠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흠이라면 5·16군사정변 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농촌혁신운동을 주도한 것, 5공화국 시절 헌법개정심의위원, 국정자문위원으로 전두환 정권에 협조한 것뿐이다. 엄혹했던 시절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협조한 것은 분명 흠이다. 하지만 그가 독재정권과 협력했던 것이 농촌혁신과 관련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평택애향가’의 내용과 역사성을 고려할 때도 가사 폐기는 잘못됐다. 애향가를 1절에서 4절까지 곱씹어 보면 유달영 선생이 평택의 역사와 지리, 문화를 깊이 이해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날 다른 작사가에게 의뢰해도 이 같은 내용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더구나 ‘평택애향가’는 지난 40년 이상 평택시민이 즐겨 불렀다는 역사성도 있다. 본인은 ‘평택애향가’를 훌륭한 작곡가에게 의뢰해 다시 작곡하기를 소망한다. 곡이 밝고 진취적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하지만 가사를 폐기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가사는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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