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가치를 바꾸는 것은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다

 

 
▲ 임윤경 사무국장
평택평화센터

시골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어르신 한 분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들은 허겁지겁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약을 준비해뒀는데 왜 안 드신 거지 이상하다” 아들이 상을 치르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약을 찾았는데 약병은 아버지가 누워있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커다란 돌멩이와 함께. 요새 약병은 꾹 눌러서 돌려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걸 몰랐다. 이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늙음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단상이다. 우리에게 늙음은 이렇게 일차적으로 다가온다.

늙음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그 경계를 지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산에 오를 때 현저하게 힘에 부친다는 느낌에서 늙음을 체감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손주를 보았을 때, 어떤 사람은 폐경에서, 어떤 사람은 소변이 통제되지 않을 때, 어떤 사람은 발기가 안 될 때 느낄 수 있다. 누구나 겪지만, 늙음은 두려움과 공포가 되어 다가온다.

얼마 전, 한 초등학교 주변에 요양원이 들어오는 것을 교사와 학부모회가 결사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땅값이 떨어진다, 도로가 좁아 차량이 많아지면 아이들이 위험하다. 이유는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살을 찌푸리는 이유는 노인들의 죽어 나가는 모습, 추한 늙은이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 초등학교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혁신학교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동체를 구현하겠다는 곳에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늙음이라,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늙음이란 가치는 구조적인 영향을 받는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는 늙음의 가치가 완전히 달랐다.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며 존경받는 존재였다. 당신이 살아온 시간만큼의 경험이 지혜이고, 마을 공동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가뭄이 들었을 때도, 홍수가 났을 때도, 마을에 병이 돌 때도, 산에서 못 먹는 풀을 구별할 때도, 모두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다. 어른이라는 존재는 그러했고, 나이 들었다는 건 그런 존재감을 말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은 무효화되고 최신 제품이 우리를 규정하는 사회가 됐다. 최신 제품을 다루지 못하면 낡은 사람, 나이 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마 독자들도 최신 제품들로 인해 나이가 들었다는 걸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나이는 먹고, 신제품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요양원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은 아마도 자신은 ‘곱게’ 늙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주름이 없고 머리숱은 풍성하고 허리는 곧은, 필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 꿈꾸는 몸이다. 그러나 노인과 장애인, ‘뚱뚱한’ 여성, 성적 소수자, 이들에 대한 차별은 바로 몸에 대한 비현실적인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육체적 고통, 신체적 비참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우아한 몸가짐을 요구한다. 무서운 현실이다. 인간이 사망하기까지 평균 투병 기간은 10년이라고 한다. 그 취약하고 ‘못생긴’ 시절도 우리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더 성숙해지고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나이 든다는 건 그런 경험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늙음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혐오하고, 젊어지려고 한다. 화장품도 ‘안티 에이징’ 제품을 쓴다. 나이 듦이 싫다는 걸 공공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린 미모, 동안이 최고 가치인 사회. 자본주의는 우리의 나이 듦이 쓸모없는 상태로 생명만 유지하는 것이라는 자괴감을 준다.

이제는 늙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늙음에 대해 고찰을 해야 할 때다. 늙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과 아닌 것은 다르다. 우리의 인문학적 성숙도가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이 듦과 그에 따른 가치를 바꾸는 것은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늙음은 우리가 곧 맞이할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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