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3월 13일

기구한 삶, 떠돌며 살다 평택 정착
동생 찾던 오빠, 거처 알고 인도 요청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高陽郡 崇仁面 貞陵里 육백 삼십 칠 번지 우원규禹元奎는 경기도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振威郡 浦升面 希谷里 이원경李元景을 상대로 하여 당년 이십오세된 자기 누이 우순애禹順愛를 인도하라는 청구 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하였는데, 원고의 소장 내용을 들은즉 (중략) 원고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더욱이 순애의 있는 곳을 찾지 못하여 각 방면으로 수색하던 바, 지난 일월 중에 순애가 피고의 집에 있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인도하기를 간청하였으나 피고는 말을 좌우로 하며 인도하여 주지 않음으로 소송을 제기한다 하였다더라.”(『매일신보』 1925년 3월 13일)

지금도 생계가 어려우면 가족 수를 줄이기 위해 어린아이를 몰래 버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해외에서는 몰래 팔아버리기도 한다. 1920년 중반에도 이러한 일이 적지 않았는데, 신문에 종종 사건으로 기사화되는 경우가 있다. 평택과 직접적인 사건은 아니었지만, 가난으로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살던 어린 여자아이가 평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제기한 소송사건이 있었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현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사는 우원규는 1908년 1월에 사망하였다. 문제는 가족의 생계가 매우 어려웠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자기 가장이 된 14세 아들 우원규는 4명의 가족을 건사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어쩔 수 없이 7살 된 누이 동생 우순애를 외조모 이모 씨에게 맡겨야만 하였다. 외조모는 경기도 광주로 이사하였지만 역시 사망을 하여 순애는 천애 고아가 되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천덕꾸러기처럼 지내다가 평택 포승면 희곡리 이원경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이룬 우원규는 헤어진 동생 순애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동생이 포승면 희곡리 이원경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우원규는 보내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이원경은 이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원규는 경성지방법원에 동생을 인도해 달라고 하는 소송을 청구한 것이다.

예부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결과는 알 수 없었지만, 불행했던 시기 어린 가족을 보내야만 했던 오빠가 혈육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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