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린다. 눈이 와야 하는데, 날이 풀어져서 비가 내린다. 종일 추적추적. 잎 진 빈 나뭇가지로 서 있는 가로수들이 비에 젖는다. 그 겨울비를 바라보는 마음이 젖는다. 평균 몸무게 64킬로그램인 70억 명의 인류가 지구 위에서 산다. 몸은 70퍼센트가 물이다. 혈관과 오장육부, 뼛속에 물이 차 있다. 인류가 몸속에 품은 물을 한군데로 모으면 바다가 생긴다. “인류는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바다”(마르탱 파주)다. 비의 일부는 사람의 몸에서 나온 물이 공중으로 증발했다가 지상으로 내려온다. 당신이 비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비가 먼저 회의주의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당신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비와의 만남은 “가족 간의 재회”(마르탱 파주)다. 굳이 비를 피하려는 것은 가족 간의 재회를 거부하는 이상심리와 다를 바 없다. 겨울비가 내리는데, 헤어졌던 가족 간의 재회도 할 겸 점심을 먹으러 바깥으로 나간다. 사람은 먹어야 사니까, 먹는 것은 숭고한 자기부양의 제1의무이다. 섭생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나 아닌 타자의 생명을 취하는 것. 그게 먹고 삶의 핵심적 진실이다. 큰 것은 작은 것을, 강한 것은 약한 것을 먹는다. 지구 생태계는 그런 먹이사슬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주려서 퀭한 눈으로 그르렁거리는 고양이와 배고파 툴툴거리는 나는 얼마나 다른가? 동물은 부분적으로 완전하고, 사람은 부분적으로만 불완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동물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는 증거는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자연 안에서 동등하다. 사람이 슬픔을 느낄 때 동물도 슬픔을 느끼고, 사람이 꿈을 꿀 때 동물도 꿈을 꾸고, 사람이 배고픔을 느낄 때 동물도 배고픔을 느낀다. 사투르누스(로마의 농경신)가 지구를 다스리던 시대에는 사람과 동물은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지금도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들은 수시로 사람에게 제 몸을 비비며 친분을 과시하고 뛰고 구르며 기쁨과 호의를 표시한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햇볕 좋은 봄날의 오수(午睡)를 즐기고, 코끼리는 목욕을 한 뒤에 명상과 사색에 잠겨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광경을 보고 놀랄 까닭은 없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놀 때, 사실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는 철학자 몽테뉴의 말에 나는 공감한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놀았다는 생각은 사람의 착각이다. 사람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만든 그토록 많은 식견과 지혜들은 실은 동물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동물계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적나라한 삶의 진실들이 생동함을 알 수 있다.

냇물 가장자리 빈터에 새끼오리 너댓 마리 엄마 따라 나와 놀고 있었는데, 덤불숲 뒤에서 까치라는 놈 새끼들 낚아채려 들려드니, 어미는 날개 펼쳐 품속으로 거두었다 멋쩍은 듯 까치가 물러나고, 엄마 품 빠져나온 새끼들은 주억거리며 또 장난질이었다. 그것도 잠시, 초록 줄무늬 독사가 가는 혀 날름대며 나타나니, 절름발이 시늉하며 어미는 둔덕 아래로 뒷걸음질 쳤다 그 속내 알 리 없는 새끼들 멍하니 바라만 보고, 그때 덤불숲 까치가 다짜고짜 새끼 모가지 하나를 비틀어 물고 갔다. 그리고 차례차례 그 가냘픈 모가지를 비틀어 물고 갈 때마다, 남은 새끼들은 정말 푸들, 푸들, 떨고 있었다. 아, 얼마나 무서웠을까? 돌아온 어미가 새끼들 부를 때, 덤불숲 까치는 제 새끼 입속에 피 묻은 살점을 뜯어 넣어주고 있었다. 아, 저 엄마는 어떻게 살까?
이성복, ‘아,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

시인은 창조한다. 이성복의 시는 창조성이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보고, 그 함의와 징조를 읽어내는 것”(게리 스나이더)이라는 걸 또렷하게 말한다. 새봄에 부화한 새끼오리들은 작고 연약한 생명의 부류에 속한다. 그것은 기필코 저보다 크고 강한 까치나 독사의 먹잇감이 된다. 어미가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새끼들은 까치에게 잡아먹힌다. 까치가 새끼오리의 모가지를 비틀어 물고 가는 것은 그것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어린 오리의 살점을 뜯어 제 새끼 입속에 넣어주기 위함이다. 어린 오리의 희생에 어설픈 연민은 삼가라. 까치를 무자비한 살육자라고 비난하지도 마라. 까치가 새끼오리의 모가지를 비틀어 물고 온 것은 피부양가족에 대한 부양의무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약자에 대한 사회보장제도가 없는 동물계에는 아주 흔한 생존의 진실이고, 자연에서는 날마다 벌어지는 냉엄한 리얼리티 드라마다. 시련은 어린 오리만의 몫이 아니다. 모든 생명 가진 것에게 까치나 초록 줄무늬 독사와 같은 살육자들과 마주하는 시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시련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뻐할 만한 행운이다. 오늘 먹고 마시며 춤추고 사랑하라! 시를 읽고 즐거워하고, 샤워하며 노래하라! 항상 살아 있음을 만끽하라!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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