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독립운동, 모두가 기억해야”


27년 공직생활, 농민 위해 힘써
퇴직 후 <평택독립운동사> 편찬

 

 

“3·1만세운동이 펼쳐진 평택역, 진위면 봉남리·은산리, 고덕면 두릉리, 안중읍 봉오산 등지에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평택역 광장의 경우에는 표지석을 세워 이러한 지역사를 홍보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독립운동가 자손으로서 직접 나서기에 부담스러운 점이 있는데, 이를 위해 앞장서고 있는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조부祖父, 이택화 선생

이재명(81세) 국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료조사위원의 조부祖父는 1919년 오성면 양교리 일대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이택화 선생이다.

“1977년 건국공로훈장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택화 선생이 제 할아버지입니다. 성공회聖公會 신자로서 전도에도 큰 힘을 쓰셨죠. 이시영 선생의 지령을 받고 상해임시정부 군자금을 조성하다가 5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고향은 오성면 양교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자, 집안의 터전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양교리로 피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6학년이 되어서야 2년간의 피난 생활을 마무리하고 상경할 수 있었죠”

이재명 위원은 어린 시절 공부를 곧잘 했다.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속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결국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군 전역 후에는 부천 미군기지에서 스낵바를 운영하기도 했죠. 한데 그 일이 내가 추구하는 인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내 낙향한 부모님을 따라 평택으로 내려왔죠”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다시 상경하려 했던 그는 공무원 시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험을 치렀다. 20여 일을 준비해 치른 시험 결과는 합격. 그렇게 공무원이 된 것이 1971년, 그의 나이 33세 때 일이다.

 

공직자로서의 삶

이재명 위원은 이왕에 공무원이 됐으니, 어렵게 사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공직에 있으며 농업행정분야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업을 펼친 기억이 있습니다. 진위시설채소주산단지와 청북어소리성장작목단지 사업이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죠. 모두 지역 농업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사업이었습니다”

단순히 농업단지를 조성한 것만은 아니다. 농산물을 규격화해 포장하게끔 제도를 만들고, 경제적으로 농기계를 모두 구입하기 어려웠던 농촌 상황에 맞춰 마을마다 영농단을 꾸리는 사업도 전개했다.

“당시에도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다 보니까 일손이 굉장히 부족했습니다. 기계화가 필수적이었죠. 콤바인, 이양기, 트랙터 등 농기계를 한 농가에서 모두 확보하기는 어려우니 마을마다 협의체를 구성하고 각자 다른 농기계를 구입해 서로 돕도록 했습니다”

공직생활 내내 초심을 잃지 않고 농민을 지원하기 위해, 농업 선진화를 위해 애쓴 이재명 위원은 2000년 안중면장을 끝으로 27년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평택지역사를 정리하다

퇴직 후 이재명 위원은 <평택시독립운동사>를 발간하는데 상임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역사를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 역사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택화 선생의 손자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평택시 담당자가 제게 제안을 해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평택시독립운동사>를 제작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했어요. 제가 퇴직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지역 독립운동사의 역사를 꿰맞추기 위해 수원과 대전, 서울 등 기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수원시도서관에서 황성신문, 독립신문 등 옛 신문을 모두 찾아 평택 관련 기사를 수집했습니다. 서울대학교와 국회도서관도 찾아갔죠.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비석 뒷면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평택지역 독립운동가를 찾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록이 전부는 아니었다. 지역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그 유족을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그렇게 1년여 간 뛰어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끝에 2004년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가 완성됐다.

“이때 발굴한 인물 중 10명이 후에 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참 뿌듯한 일이죠. 이외에도 <평택시통합사>, <평택시사>를 편찬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대한성공회 안중교회 80년사>와 <대한성공회 평택교회 40년사>는 직접 자료를 조사하고 책을 펴냈죠”

그는 2011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예전만큼 열정적이지는 못해도 그의 관록은 지역에 큰 힘이 된다.

지난해부터는 대한성공회 안중교회장학위원장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재명 위원은 안중교회장학위원회와 함께 선교적 사명으로, 지역 인재를 발굴·육성하는 데 앞장설 계획이다. 고령에도 지역을 위해 헌신하는 그의 자세는 지역 후배들의 충분한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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