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11일

청북·현덕·포승·서면 일대
수백 호 침수, 시내 범람

 

 

 

“十一日 午后 七時頃에 西海 沿岸에 海水가 漲溢하여 平澤 附近에 被害가 多大한 데, 方今 調査 中이므로 詳細치 못하나 聞한 바에 依하면 振威郡 靑北面 玄德面 浦升面에 一部 及 梧城面 倉內里 堂巨里 及 西面 棹頭里 大楸里 等地가 尤甚한 바, 西面 棹頭里에는 地上으로부터 約 二尺 五寸 乃至 三尺의 海水가 溢하여 浸水 家屋이 數百戶요 家畜의 死傷이 不少하였으며, 家具의 流失이 非常히 多한 慘狀을 呈하였으나 幸히 人命에는 死傷이 無한 듯 하며, 尙今日까지도 海溢이 繼續 不休하여 平澤 市街地에까지 氾하였으나 平澤에는 何等 被害는 無하며 一般 民心은 極히 忷忷하다더라.”(『매일신보』 1919년 1월 19일)

‘해일(海溢)’은 폭풍, 지진, 화산 폭발 등이 원인이 되어 바다의 큰 물결이 육지로 갑자기 넘쳐 들어오는 자연현상으로, 우리의 삶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다. 2011년 3월11일 발생한 규모 9.0의 동일본 대지진으로 들이닥친 거대한 ‘쓰나미’ 즉 해일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수소폭발과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방사능에 대한 공포가 일상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일에 대한 피해가 비교적 크지 않았지만,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초에 평택에서는 해일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1919년 1월 11일 오후 7시경 서해안에서 해일이 있었다.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해일로 가장 피해를 본 곳이 평택이었다. 우선 청북면, 현덕면, 포승면 일대와 오성면 창내리, 당거리, 서면(현 팽성읍)의 도두리와 대추리 지역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도두리에는 파고가 75~90㎝에 달하는 바닷물이 밀어닥쳤다. 이로 인해 가옥 수백 호가 침수되었으며, 죽거나 상해를 입은 가축 또한 부지기수였다. 이외에도 집 안에 있던 가구들이 바닷물에 떠내려가 처참한 상황이었다. 늦은 저녁이라 피해가 더욱 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해일로 인한 바닷물은 평택 시가지까지 밀려들었는데, 읍내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당시 해일로 인해 평택 서부지역뿐만 아니라 평택의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요즘 한국 사회에 퍼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극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2개월 후에 전개된 3·1만세운동에 평택 주민들이 적극적 참여하였다는 점은 새롭게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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