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살짝 기울고 땅거미가 지는 무렵, 사방은 자꾸 어둑어둑해져서 어렴풋이 사물의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시간, 이 시간을 프랑스 사람들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이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뿐, 자세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시간, 그래서 그것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기 위해 오는 늑대인지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에서 붙여진 은유입니다.

멀리서 보면 개와 늑대는 같은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정작 그 둘의 성질은 전혀 다릅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동물이 내가 기르던 개라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것이 늑대라면 나는 곧 목덜미를 물릴 것입니다. 그래서 형태만 보고 함부로 속단했다가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은  선거 때 많이 등장하곤 합니다. 후보자의 미소나 후보자의 공약이 정말 우리의 미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권력을 잡기 위한 포장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를 비유하기에는 이 은유적 표현이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멋지고 화려한 공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 근시안적인 공약일 수도 있고, 큰 것만을 추구하느라 정작 작은 것은 소외받아도 괜찮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공약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인성은 내면에 감춰져 있는 것이므로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내면에 감춰진 인성은 그가 살아온 내력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인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좋은 공약을 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면 숨겨졌던 인성이 그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약자를 함부로 할 수도 있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권력을 잡기 이전보다 훨씬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학벌이 좋아도 가슴으로 깨닫는 지식이 아니라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사람들을 현혹하기 더 쉽습니다. 그들의 말은 얼핏 들으면 논리적인 흐름을 띠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논리만 있고 정작 사람이나 생명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논리로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해석한다면 우리는 개와 늑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려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과 소피스트의 궤변을 식별하기가 어렵듯이 개와 늑대를 알아보는 일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절대적 진리를 말했다면 소피스트는 언제나 진리의 상대성을 역설하니까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는 모두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본질에 있어서나 결과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릅니다.

원칙과 신의는 정치의 기본입니다. 신의가 무너지면 정치의 생명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너무나 쉽게 원칙과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 선택의 열쇠는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벗어나 밝은 여명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의 선택이 과연 현명했다고 자신하려면 무엇보다 신중하게 후보자를 검증하고 후보의 공약을 세심히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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