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1월 23일

식산흥업 발달·공익사업 진흥 목적
내선융화 위한 관변단체, 회장 일본인

 

 

“京畿道 平澤驛에서 同郡의 殖産興業의 發達을 圖하고 並히 運輸 交通 等 公益事業의 振興을 目的하여 內鮮人 百二十餘名으로 組織된 平澤振興會는 去 二十三日에 平澤公立普通學校 內에서 發會式을 開하고 會則 通過, 役員 選定을 滿場一致로 可決하였는데, 同會 會長은 石川耐藏, 副會長은 尹道植, 幹事는 徐丙稷 目良重一, 顧問은 小崎利一 岡松弘樹 山崎彦治 等 諸氏라더라.”(『매일신보』 1919년 11월 30일)

지난 신문(3월 13일자)에 지역 유지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은 지역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집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이익단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하는데, 평택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지역 유지들이 조직한 대표적인 단체가 ‘평택발전회’와 ‘평택진흥회’였다. 평택발전회가 지난 신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택인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면, 평택진흥회는 평택인과 일본인이 함께 참여한 조직이다. 그렇다면 평택진흥회는 어떤 조직인가 하는 점이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이후 관민상화官民相和, 내선융화內鮮融和 등을 내세우며 식민지배에 협력하는 세력들을 양성하고 하였다. 이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으로까지 확장시켜 나갔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진흥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단체가 대체로 그런 성격을 보이고 있다. ‘평택진흥회’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11월 23일 발회식을 가진 평택진흥회는 식산진흥의 발달을 도모하고 운수와 교통 등 공익사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회원은 내선인內鮮人 즉 평택인과 일본인 120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큰 조직이었다. 회장은 일본인 이시가와石川耐藏, 부회장은 윤도식尹道植으로 전형적인 내선융화를 위한 관변단체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간사 역시 평택인 서병직徐丙稷과 일본인 메라目良重一로 2명을 두었다.

회장 이시가와는 평택우편소장으로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재직하였으며, 조선총독부 교과서 발매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부회장 윤도식尹道植은 3·1운동 이후 병남면장으로 임명되어 1924년까지 5년간 활동하였다. 고문으로 선임된 오사키小崎利一은 진위경찰서 소속의 도경부, 오카마쓰岡松弘樹와 야마자키山崎彦治는 진위군 서기로 재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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