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초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 상인은 방패를 팔 때마다 “이 방패는 대단히 단단해서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창을 팔 때는 “이 창은 대단히 날카로워 어떤 것이라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선전했습니다. 어느 날 상인의 말을 듣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른다면 어찌 되겠소?” 그러자 상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뚫리지 않는 방패와, 못 뚫는 것이 없는 창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비자>에 나오는 ‘모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순은 주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 자주 거론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한비자가 말하고자 했던 ‘모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 한비자는 어진 순나라 임금이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할 수 있었던 것은 요나라 임금의 실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창과 방패를 예로 들었습니다. 즉,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둘을 동일한 관점에서 놓고 보면 옳고 그름을 가리기 어렵고, 한발 나아가 어느 하나가 빛나는 것은 그 반대의 것이 있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모순’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단순히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단순히 흑과 백의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흑이나 백으로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단순하게 만듭니다. 그보다는 흑과 백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 오히려 우리의 사고는 더욱 확장될 수 있습니다. 흑과 백은 언제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알기 위해서는 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밝음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어둠을 알아야 합니다. 뜨거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차가움을 경험해야 하고, 직선의 강직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곡선의 유연함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연속과 불연속, 통일성과 다수성, 보편성과 특수성은 서로 모순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도 결여와 욕망이 충돌하고 있고 때로는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의 내면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켜 영향을 주고받을 때 인간은 도전과 성취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핍은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은 성취를 자극하는 기제가 되니까요.

삶의 모순이 드러나는 사람에게서도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순은 어쩌면 더 큰 발전으로 갈수 있는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충돌하는 두 가지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얻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있을 때 우리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아니 이 세상에 내재된 커다란 모순의 징후들은 어쩌면 더 나은 미래로 모습을 바꾸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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