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를 추억하며
평택지역 식문화를
생각해 본다

 

▲ 정계숙
자유기고가

창문을 열어보니 산들바람이 귓가를 스치는데 그 느낌이 좋았다. 문득 며칠 전 아쉬움을 남겨두고 돌아왔던 ‘평택 섶길’ 비단길 코스가 생각나서 가볍게 차려입고 평택호로 향했다. 길은 추억을 불러오는 기억의 마중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평택을 둘러보는 작은 길 ‘섶길’은 마치 고이 간직해둔 추억의 사진첩을 펼쳐보는 것 같아 소중하고 정겹다.

한국소리터에서 출발해 평택호2길과 기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배 밭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꽃눈전정 하는 일손이 분주하고 허리가 굽은 어르신께서 퇴비를 뿌렸다. 얼어붙었던 논·밭두렁에는 겨우내 생명을 품고 있었던 언 땅에서 제법 자란 냉이와 씀바귀, 솜털같이 부드러운 어린 쑥이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서해선 공사 현장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대안리 구진마을이 보였다. 구진마을에는 해방 전후 대표적 어항漁港인 구진나루가 있었고 이곳의 대표어종으로는 숭어·강달이(강다리)·병어·깡치(어린 참조기) 등이 있었다. 지금도 평택 숭어는 인기가 있어 경기만 평택호 앞바다에 낚시꾼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으고 있다.

숭어崇魚·秀魚·水魚는 조선시대 관용어로는 치어鯔魚이며 우리나라 어류 중 방언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성장단계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다. <향약집성방>(1433년, 세종15)에는 치어의 향명鄕名은 수어水魚이며 “맛이 달고 평平하며 무독하고 위를 열고 오장을 통리通利하며 오래 먹으면 사람을 튼튼하게肥健 하며, 진흙을 먹기 때문에 모든 약에 꺼리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나라에 숭어秀魚 440마리를 진헌했고,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에 경기에서 토공으로 숭어水魚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도문대작, 해수족지류海水族之類에 기록돼 있는 숭어水魚는 경기지역의 명물로 유명하다고 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맛은 좋고 깊어서 물고기 중에 최고로 꼽히며, 작은 것은 ‘등기리’, ‘모치’는 가장 작은 것이며 ‘모당’, ‘모장’이라고도 했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 어명고, 강어江魚에는 숭어를 ‘치緇’라 쓰고 한글로 ‘슝어’라 하며 그 모양이 길고 빼어나기 때문에 수어秀魚라 했다.

숭어는 우리나라 최초의 식의서食醫書 <식료찬요>에 위장질환에 사용했고, 경상도 영양의 장계향이 쓴 <음식디미방>에도 ‘숭어만두’ 조리법이 나올 만큼 많이 사용됐던 식재료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도 ‘수어백숙탕’, ‘수어장증’, ‘수어탕’, ‘수어잡장’ 등이 진설됐다. 숭어알은 어란魚卵을 만들어 임금님께 진상되었고 양반가에서는 명절음식이나 제사 등 고급 안주로 사용될 만큼 그 맛이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7권 4월 16일과 5월 16일 건어란乾魚卵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고종실록> 3권 10월 20일에는 병인양요 때 출정했던 군사들에게 호궤하고 시상할 때 순무영巡撫營에서 군량을 도운 선비들과 백성들에 대한 기록을 올렸는데 이군옥李群玉이 조기 5속과 어란魚卵 5부를 바쳤다고 한다.

숭어 어란은 예로부터 평택과 영산강 하구 영암이 유명한 산지였다. 영암은 전통방식으로 어란 명인들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평택은 어란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경기만 평택호 앞바다에는 지금도 숭어가 많이 잡히며 바로 옆 평택호관광단지 음식점에서는 숭어회를 맛볼 수 있는데… 햇살이 좋은 이른 봄에 ‘섶길’을 따라 걸었던 옛 구진나루 부근에서 숭어와 강달이(강다리) 등을 가득 싣고 가족 품으로 돌아오던 어부들의 그을린 얼굴과 기골이 장대한 모습 그리고 포구로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아낙네들의 행복한 미소를 그려보며 평택지역의 식문화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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