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1월 5일

쌀 수출고 연중 40~60만 가마니
매매수수료 1전, 사무실 평택역전

 

 

“平澤은 全鮮 中 米穀産出地로 名이 有하여 輸出高 每年 四十萬 乃至 六十萬 叺을 算하는 中, 此 多大數를 賣買함에 一定한 場所와 完全한 方法이 無함으로 時勢 變動이 甚한 時에는 同業者 間에 不平이 疊出하더니. 今年부터는 其 方針을 一新 改革하여 平澤驛 附近에 事務所를 置하고 資本金 二萬 五千圓 豫算으로 平澤米穀賣買組合을 設立하여써 一般 賣買의 市場 又는 倉庫業을 經營할 터이라는데, 賣買手數料는 一叺에 對하여 賣買 兩便이 各 一錢式이라 하며, 同 組合이 成立되는 時는 아마 平澤米穀商同業組合과 倂合되리라는 說이 有하더라.”(『매일신보』 1919년 11월 5일)

평택은 비록 일제강점기지만 쌀의 이출移出이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한 해 동안 평택역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쌀이 팔려나간 것은 적게는 40만 가마니, 많게는 60만 가마니였다. 그 정도로 평택은 쌀의 생산지이기도 하였지만, 쌀의 수출지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처럼 쌀이 평택 이외 지역으로 팔려나가지만, 시세에 따라 쌀값의 변동이 컸다. 때문에 쌀을 매매하는 상인의 입장에서는 불평이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을 설립하였다. 이름 하여 ‘평택미곡매매조합’이었다.

평택미곡매매조합은 평택역 부근인 현재의 원평동 쪽에 사무소를 설치하였고, 자본금은 2만 5000원이었다. 조합 사업의 주요 내용은 쌀의 매매와 이를 보관하는 창고업이었다. 그리고 쌀을 매매하며 수수료를 받았는데,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에게 각각 1전을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미곡매매조합’이 설립된 이후 기존의 ‘평택미곡상공동조합’과 합병할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는 점이다. 미곡상공동조합이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1915년 10월 10일부터 미곡검사를 미곡상공동조합이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1917년 10월에는 직원이 무려 40명일 정도로 사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언제 두 조합이 통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29년에는 ‘평택미곡상조합’, 1930년에는 ‘평택미곡조합’, 1932년에는 다시 ‘평택미곡상조합’이라는 조합명을 사용하였다.

미곡상조합이든 미곡조합이든 두 조합의 조합장은 성주한成周漢이 맡았다는 점에서 같은 조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조합장으로는 가끼우치垣內恒太郞, 모리森賢吉 등 일본인이 맡았다. 조합장을 평택인이 맡았다는 점은 적어도 미곡상의 영향력은 평택인이 장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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