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지역의 정체성과
기억을 간직한 공동체 산물로
보존해 나가자

 

   
▲ 나경훈 교사
진위초등학교

출근길 항상 지나치는 화훼단지가 있다. 이 근방에서는 언제나 차가 막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화초들과 한 프레임에 잡히기엔 너무나 생뚱맞은 오랜 묘비와 망주석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근래 만들어진 복제품이겠거니 하면서도, 지나칠 때마다 유심히 관찰한 결과 ‘조선朝鮮’이라는 한자가 확연히 들어왔다.

아무리 한자에 까막눈이라도 ‘조선朝鮮’이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진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사람의 묘비일터인데, 도대체 왜 이곳에 갑자기 나타났을까? 혹시 이 자리에서 새롭게 발굴된 것은 아닐까 하는 호기심에 차에서 내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형적인 조선 시대 묘비였다. 혹시 지금까지 잠들어있던 평택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새로이 깨어나는 것은 아닌지 묘한 흥분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옆에 있던 사무실에 노크하고 주인으로 뵈는 사장님께 이 새로운 역사의 현장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렸다. “사장님, 혹시 이것들이 이 공사현장에서 새롭게 발굴되었나요?” “아, 그거요? 골동품가게에서 사 왔는데요?” 조상의 묘비가 골동품이라고? 아니, 다른 집안의 묘비를 골동품으로 사서 온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오히려 묘하게 이 묘비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배가 되었다. 도대체 누구의 묘비일까?

그리고 그 궁금증은 쉽게 해결됐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이 비석의 출처가 고스란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문에 새겨진 ‘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朝鮮遺民梧山李公之碑’란 ‘조선이 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 오산 이선생’ 비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오산 이선생은 조선후기 유학자 ‘이용헌’이었다. 기가 막힌 사실은 이용헌의 호인 ‘오산’이 당연히 근처 경기도 오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오치동의 산수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즉, 오산 이선생인 이용헌은 지금 이곳 평택 근방에는 전혀 연고가 없는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비석은 이용헌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인 ‘오산정’ 앞뜰에 나와 있는 것으로 검색됐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곳에서 찍힌 사진이 광주문화원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황망한 마음에 광주문화원에 전화했고, ‘오산정’이 위치한 광주광역시 북구 행정복지센터에도 전화를 했으나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두 곳의 홈페이지에는 분명히 ‘오산정’에 대한 연원을 비롯해 비석의 행장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는데 말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현재 ‘오산정’이란 정자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마저도 담당자들이 미처 여부를 파악하지 못하다가 내 전화를 받고 직접 가보니 흔적도 없이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문화유산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유실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안타깝지만 우리 지역 평택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을 과거에 매몰시키거나 한 집안의 가보로만 인식하지 말고, 계속해서 재생해 지역의 정체성과 기억을 간직한 공동체의 산물로, 후대에 물려주고 보존해 나가야 할 집단의 책임으로 전향해가야 한다.

비문의 주인공인 이용헌은 살아생전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의 아름다운 풍광을 많은 시로 남겼다고 한다. 구천을 떠돌던 그의 영혼은 이제 일면식도 없던 평택에 마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과연 어떤 시를 써 내려갈까? 외세의 개입으로 바람 잘 날 없던 구한말, 나라 잃은 백성 ‘조선유민’으로 살아 온 그가 또다시 고향을 잃고 타지에 전입해 오게 되었다. 부디 제발 볕 좋은 곳에서 편히 잠드시길. 당신의 전입을 슬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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