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9월 26일

명관일 줄 알았더니 주민 착취
부역·학교 보조금 강제 각출

 

 

“진위군수는 면면이 다니며 연설을 하며 백성을 효유하기에 명관인줄로 모든 백성이 바라고 믿었더니, 진위정거장과 진위읍 사이에 신작로를 낸다고 면면이 백성으로 부역을 시키며 학교 보조금이라 하고 한 면에 일백이십 환씩 거두어 드리라고 각 면장들을 잡아 가두어 보조금을 십오면에 다 받아드리니, 개화학교는 이렇게 설시하는지 궁절에 백성을 이렇게 못 견디게 하니 참으로 부지할 수가 없다고 원성이 창천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 26일)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낫다”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더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특히 직책을 새로 맡은 인물에게 많이 적용된다. 새로운 사람에게 기대를 했는데, 그 전에 맡았던 사람보다 못할 때 주로 사용한다.

1908년 9월 초 진위군수가 새로 부임되었는데, 전임 군수보다 못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실망하고 원망을 하였다. 그 사연을 본즉 다음과 같다.

평택을 떠나는 전임 군수 김영진 金英鎭은 1907년 7월 24일 부임하여 1년 동안 있으면서 진문학교 振文學校, 사범 의성학교 義成學校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적극 노력하여 평판이 좋았지만, 일본수비대에 닭과 달걀을 공급하면서 헐값으로 치렀기 때문에 원성이 자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군수가 김복규 金復圭였다. 부임한 초기에는 각 면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였는데, 이를 들은 주민들은 명관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복규 군수는 진위정거장과 진위읍 사이에 신작로를 만든다고 주민들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기가 추수를 하는 농사일 중에서 가장 바쁜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군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개화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학교보조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120환을 거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관내 15개면에 이를 할당하였다. 당시한 해도 한촌에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에게 강제로 보조금을 부담케 함에 따라 원성은 더 높아 갔고,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조선신사보감>에 의하면 “관직에 있을 동안 겸손하고 강직하여 모두 칭찬하였음”이라고 인물평을 하였는데, 이는 지역 주민의 정서와 맞지 않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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