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1동은
평택지역 역사문화의
보고寶庫다

 

   
▲ 김해규 소장
평택인문연구소

몇 년 간 소사1동 대동법시행기념비 주변 역사문화공간에 대한 논란이 거듭됐다. 이전을 요구하는 주민들도 있었고, 문화재는 본래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 문화재 주변의 도로 확장과 주차공간 마련에 대한 요구도 제기됐다. 근래 평택시가 발주한 ‘도지정문화재 대동법시행기념비 보존 및 활성화를 위한 연구용역’은 그간의 지역여론에 대한 응답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평택시나 용역회사의 ‘소사동 역사·문화 공간’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제한적이고 미흡하다. 필자는 올바르고 원활한 사업 전개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첫째, 소사동은 ‘삼남대로’의 핵심 구간이다. 삼남대로는 평택구간에서 흰치고개, 칠원1동 갈원, 소사1동을 지났다. SK뷰아파트에서 대동법시행기념비를 지나 소사1동에 이르는 좁은 길은 평택지역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삼남대로의 원형(새마을운동 때 확장되었음)이다.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이곳에 건립됐던 것도 삼남대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지도와 주민 구술에 따르면 소사원은 당산 남쪽 산 밑에 위치했다. 대동법시행기념비도 소사원 옆 큰길가에 있었다. 혹자는 미곡처리장 운운하지만 그곳에는 대동법시행비 앞의 안성군수 송덕비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 같은 역사성을 고려할 때 SK뷰아파트에서 소사천 사이의 삼남대로 구간은 반드시 보존돼야 한다. 그런데도 이번 ‘용역보고서’에는 삼남대로에 대한 고려가 빠졌다. 대동법시행기념비 주변 정비사업은 삼남대로와 함께일 때 역사성이 살아난다.

둘째, 소사동은 정유재란(1597~1598) 육전陸戰 3대첩의 전적지며, 풍도와 함께 남한 유일의 청일전쟁(1894) 전적지다. 정유재란은 임진년(1592)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이 휴전협정이 결렬되자 재침한 사건이다. 소사동 일대는 삼남三南을 점령하고 북상하던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북상을 좌절시켰던 역사적 장소다. 청일전쟁(1894)은 대륙침략을 꿈꿨던 일본이 동양의 패자霸者 청나라와 싸웠던 사건이다. 남한 내 청일전쟁 유적은 아산만 입구 풍도와 소사동에서 성환 사이가 유일하다. 정유재란과 청일전쟁은 동북아의 평화와 상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 같은 역사성을 반영한 콘텐츠 계발이 필요한 지역이라는 말이다.

셋째, 소사동 일대는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이 발견된 장소다. 근래 개발에 따른 발굴조사로 평택지역 곳곳에서 다수의 선사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지만, 소사동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매우 크다. 소사1동의 역사적 스토리텔링은 이것과 연계되어야 한다.

넷째, 소사동은 소사장과 마을제당, 소사동 미륵이 위치한 민속 문화의 보고寶庫다. 교통의 요지로 ‘소사장’이 발달했고, 당산에는 마을제당(당목)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소사동미륵이 있다. 소사동미륵은 과거 소사원을 오가는 여행자들의 기도처로도 사용됐다. 소사천의 ‘소사목교’는 풍광이 수려해 삼남대로를 지났던 수많은 시인詩人과 묵객墨客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제공했다. 목은 이색, 점필제 김종직, 계곡 장유의 절창이 다리 위에 전한다.

평택지역에서 ‘길 박물관’을 건립한다면 소사동이 최적지다. ‘청일전쟁 평화박물관’의 최적지며, ‘청동기주거발물관’도 이곳에 건립해야 맞다. ‘평택문학박물관’도 소사동이 적지다. 필자는 평택시의 이번 용역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대동법시행기념비’ 하나만 보고 용역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문제다. 그러다보니 소사동의 다양한 역사·문화적 스펙트럼을 담아내지 못했다. 필자는 소사1동을 역사문화지구로 지정하고 ‘역사문화마을’로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재 지정으로 입은 재산상의 피해를 보상하는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 종합적 학술조사를 다시 실시하고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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