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소문으로 먼저 온다. 응달에 잔설이 있고, 북풍은 찬 기운을 머금었다. 해는 늦게 떴다가 빨리 진다. 잎눈, 꽃눈은 아직 청맹과니에 귀머거리들이다. 겨울이 헐벗은 나무들 사이에서 엄연한데, 그 엄연한 것을 가로질러 봄의 소문이 소곤소곤 번진다. 소문이 커지면서 우리 귀와 살갗에 소문들이 비벼진다. 동백, 매화, 산수유, 유채꽃들이 먼저 꽃봉오리를 연다. 훈풍에 코를 킁킁대면 꽃냄새가 난다. 겨울 속의 봄을 믿는가? 한 철학자는 제가 참되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다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감각은 가끔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단 한번이라도 속인 것은 믿지 말자. “아주 작은 것과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들에 관하여는 감각이 가끔 우리를 속이지만,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 가운데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가령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난롯가에 앉아 있다는 것, 겨울옷을 입고 있다는 것, 이밖에 이와 비슷한 것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 나의 이 손과 이 몸이 내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내가 미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가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르네 데카르트, ‘성찰’) 철학자는 감각을 의심하고, 현실을 의심했다. 하지만 이 손과 이 몸이 내 것이라는 의심할 수 없다면 봄이 돌아온다는 것도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입춘이다. 이 아침 쏟아진 눈 폭탄은 문 앞에 당도한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의 징표인가. 산과 들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세상은 눈 속에서 고요한데, 빈 나뭇가지들마다 설화가 눈부신 자태를 뽐낸다. 눈 내린 아침 모든 것은 명백하고 세계는 일목요연한 질서 속에 있다. 모든 첫사랑은 깨어지고, 존재의 비밀들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고, 지하철과 기차들은 제 시각에 정류장에 섰다가 떠나고,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은 새벽에 가장 붐비고, 묵은 감자와 양파에서는 싹이 돋고, 증시는 새 날을 맞아 제 시각에 어김없이 개장한다. 이 눈으로 말미암아 오려던 봄의 걸음은 늦춰지고, “아득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서정주, ‘밀어’)들의 시간도 늦춰진다. 그러나 눈 속에서도 복수초는 노랗게 피고 노루귀는 파랗게 귀를 연다. 어디 그뿐이랴! 한반도 서남 지방 동백은 사자처럼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가지마다 붉은 꽃을 피운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 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송찬호, ‘동백이 활짝’

입춘에 들이닥친 눈 폭탄도 남도 동백의 붉은 꽃소식을 막을 수는 없다. 겨울이 모질어도 선홍빛 뺨으로 피는 향일암 애기 동백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백은 제 안의 붉음을 한사코 밖으로 밀어내어 시리도록 붉은 꽃송이로 모은다. 동백은 붉은 꽃잎을 겹겹이 싸고 그 절정에서 모가지 째 떨어져 나뒹군다. 동백은 이마도 붉고 발바닥도 온통 붉다. 그 붉음 속에 한 번 핀 것은 한 번 지기 마련이라는 식물적 진리는 엄연하다. 저 고요한 나무 위로 백수(百獸)의 왕이 네 발을 펼치고 붉은 갈기를 날리며 솟구친다. 세계를 향한 그 격발의 비장함에 젖어있는 우리에게 시인은 꽃 핀 앉은뱅이 동백이 실은 허공으로 솟구치는 사자였음을 일러준다. 나의 단심(丹心)은 곧 너를 향한 내 안의 수심(獸心)이었던 거다. 식물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으로 반전(反轉)하는 이 찰나라니! 바람은 저 동백꽃을 베어 물고 땅으로 뛰어내린다. 눈 쌓인 입춘 아침에 우리에게 주어진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서 저 동백의 단심이 필요하다.

봄은 기어코 온다. 눈 쌓인 입춘 아침에도 봄은 한 걸음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이성부, ‘봄’) 봄은 와서 산천에 전면적으로 저를 펼치면서 기정사실화한다. 우리가 의심하는 동안에도 봄은 한 걸음씩 다가온다. 그리하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리다”(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봄은 향기로 퍼지고 미친 불길로 번진다. 봄은 어느새 숨결이고 내면이다. 봄과 시는 한 몸뚱이다. 봄은 시를 낳고, 시는 누리에 번진다. “자운영 들판 위의 훈풍/지극정성/고행/슬픔 속에 들어 있는 기쁨/어차피 고독할 것”(고은, ‘큰 이야기’)으로. 봄은 안으로 스미면 마음은 바깥으로 밀려난다. 봄은 시와 꽃과 춘정의 펼쳐놓음이고 그 넘침이다. 봄은 그 모든 것들의 걷잡을 수 없는 사태(事態)다! 봄이 사태라면, 시는 차라리 격류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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