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은 제 삶 자체였죠”


평택에서 노동운동·시민운동 앞장
하루 3만보 걸으며 우울증 극복

 

 

“채한석이라는 이름 석 자는 많이 알려졌을지 몰라도, 건강은 잘 돌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가족을 위해 일하면서 아내와 함께 몸도, 정신도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노동운동에 빠져들다

전라남도 무안군이 고향인 채한석(66) 전 실업극복평택센터 대표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상경을 결심했다.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면서 집안이 엉망이 됐습니다. 빨리 독립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죠. 그렇게 청계천의 한 봉제공장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대우조선소 직업훈련소 1기생으로 전기용접을 배워 중동 사우디아라비아를 다녀오기도 한 채한석 대표는 1983년 홀로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친형님이 사는 인천에 자리 잡았다.

“당시 인천에서 진도라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이곳에 입사하고 6개월쯤 뒤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을 만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죠”

그는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법’을 공부했고,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앞장섰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측이 이를 알아챈 것이다.

“노동조합 결성에 실패하고, 회사에서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농성하면서 공장 굴뚝에 올라가려고도 했지만, 당시 임신 중이던 제 아내를 생각해 끝내 포기했죠”

 

평택에서의 노동운동

블랙리스트에 올라 인천에서 취업할 수 없었던 채한석 대표는 1985년 우연히 만난 대우조선소 동기의 소개로 경동보일러에 입사하면서 평택에 내려왔다.

“배운 것이 있으니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30분을 일찍 출근해야 하는 회사 내규가 있었는데, 이를 노동부에 제소해 모든 동료가 조기출근 한 것에 대한 임금을 받을 수 있게끔 했어요”

그는 인천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직접 동료들을 가르쳤다.

“노동조합 결성하기로 한 날 식당에 모여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관련 서류를 담당했던 한 동료가 사측에 의해 현장에 오지 못했고 결국 노동조합 결성은 실패했습니다”

또다시 회사에서 해고된 채한석 대표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그 후 평택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떤 기업에도 취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리어카 하나를 끌고 평택역 건너편 골목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어요”

그는 얼마 뒤 아내에게 포장마차를 맡기고, 노동상담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공단에 명함을 뿌리고 다니며, 노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때 경동보일러에서 해고된 뒤 쌍용자동차로 들어간 많은 후배가 함께하기도 했죠”

채한석 대표는 당시 평택지역의 택시, 제지공장 등 여러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며 지역에 노동운동이 뿌리내리게 했다.

 

평택 시민운동의 시작

채한석 대표는 1989년 김용한, 이은우, 윤현수 등 여러 동료와 함께 ‘평택시민모임’을 결성했다.

“이때 결성한 평택시민모임이 평택 최초의 재야 시민단체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동료들과 함께 지방자치제도와 의료보험제도, 금융실명제 등 사회시스템을 공부하고, 이 시스템이 지역에 안착하도록 하는 활동을 전개했죠”

이듬해에는 ‘용산미군기지평택이전반대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용산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뉴스를 보고 여러 동료와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주로 언론 인터뷰나 기자회견, 집회 등을 통해 지역에 미군기지 이전 반대 여론이 형성되도록 힘을 썼죠”

지속해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펼쳐오던 채한석 대표는 IMF가 터지고 난 뒤 설립된 평택실업극복센터의 초창기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자리를 잃은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기에 설립에 동참했습니다. 당시 소외계층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고물상을 만들거나, 자전거 수리 등 여러 자활 사업을 추진했죠. 입법 활동을 위해 전국의 활동가들과 함께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추리 사태 당시 미군기지이전반대평택대책위의 공동대표를 지내고, 쌍용자동차 노동자 정리해고 당시에는 77일간 투쟁에 함께하며 항상 약자의 편에서 동행해왔다. 여러 아픔을 지켜보면서 한때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루 3만보 이상 걸으며 우울증을 이겨냈다는 채한석 대표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빚을 진 것 같다며 자책한다. 자신이 좀 더 노력했다면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일생을 노동운동과 함께하며 사회 발전을 위해 힘써 온 그가 이제는 편히 쉬어도 되지 않을까. 후배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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