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고서점 발견, 1924년 7월 3일자 신문 게재
조선민중 고난, 일제 통치에 관한 비판내용 담겨


 

 

 

“전 조선 도처에 이러한 굶주림에 빠진 인민으로서 채웠다. 남북만주나 서시베리아나 또는 일본 각지에까지 이러한 기아에 쫓기는 조선인 대중이 있다. 그들은, 그의 있는 곳마다 훌륭한 밭과 논이 있으면서, 혹은 찻길로 혹은 뱃길로 몰려가는 수십만 명의 미곡을 날라 보내면서도, 그 자신의 추위와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 안재홍, “아사, 압송, 증사”, <시대일보>, 1924년 7월 3일자 2단

평택 출신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 선생이 쓴 귀중한 신문자료가 최근 서울의 한 고서점에서 발굴돼 눈길을 끈다. 이번에 발굴된 신문자료는 1924년 7월 3일자 <시대일보>에 실린 글로 2면 1단에 민세가 쓴 ‘아사餓死, 압송押送, 증사增師’라는 원고가 실려 있다. 이 글은 천관우 선생이 정리한 <안재홍선집> 1권에 실려 있으나 그동안 원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이 글에는 당시 굶주리는 조선 민중의 고난과 일제의 강압통치로 인한 조선인의 체포·구금·압송·처형의 비참한 현실, 독립운동 차단을 위해 일제가 국경지역에 사단병력을 증설한데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민세는 1919년 11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대구 감옥에서 1차 옥고를 치르고, 1922년 6월 출옥했다. 이후 고향 평택에서 몸을 추스르고 1924년 3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에 정치부장 겸 논설기자로 참여했다. 당시 4면, 2만부를 발행한 시대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국내 3대 언론사였으나 경영의 어려움으로 <중외일보>, <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으로 신문 제호가 바뀌었다가 1937년 11월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됐다.

<시대일보> 시절 민세는 ‘살기에 쌓인 문화정치’ ‘아아, 그러나 그대는 조선 사람이다’ ‘사막으로 향하여 가는 조선인’ 등 다수의 논설을 발표해 일제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민중계몽에 힘썼다. 그러나 <시대일보>는 그해 7월 보천교의 기관지로 변질했으며, 내부 반발이 이어져 휴간하다가 민세를 비롯해 김형원, 김정진 등이 함께 퇴사했다. 이어 곧바로 이상재를 사장으로 신석우가 혁신 <조선일보>를 경영하자 이사 겸 주필로 초빙돼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하게 된다.

황우갑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이번에 귀중한 자료가 발굴돼 기쁘다. 불과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대일보>는 민세가 언론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이 시기 글에서는 순도자殉道子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해외 망명 대신 국내에 남아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부단한 비판과 민중계몽으로 절대독립의 꿈을 이루겠다는 언론인 민세의 고뇌가 묻어나는 글”이라며, “앞으로도 민세의 분야별 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자료수집으로 고덕국제신도시 역사공원에 안재홍기념관이 충실하게 조성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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