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정·기념전시
평택문화원, 인물지 발간·학술세미나·아카이빙전시·웹툰 제작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표 인물, 이석영 콘텐츠 개발사업 추진


 

 

 

 

▲ 독립운동가 이석영 초상화

평택시 진위면에 터를 잡고 살아온 경주이씨 백사공파의 후손 이석영이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 추진한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이석영은 일제강점기 6형제와 함께 서간도로 망명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춧돌을 놓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석영은 1855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평택 경주이씨 상서공파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간 후 동생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특히 6형제의 둘째 이석영은 서울 정동 99칸 집과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 논·밭,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별서와 전답 등 전 재산을 처분해 서간도에서 독립군 기지 개척과 운영 등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했다.

이석영의 재정지원으로 1911년 서간도에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가 설립됐으며,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실시해 구국인재를 양성,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했으나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같은 고난 속에서도 이석영이 기부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돼 1911년 6월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서 개교식를 가졌다.

1912년에는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석영은 주변의 권유로 교장을 맡게 되는데 이석영이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처럼 이석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성품을 지녔다.

신흥무관학교는 추가가에서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해외 독립전쟁사에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이석영이 전 재산을 기부하는 등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탄생은 어려웠을 것이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면서도 노후에는 끼니조차 잇기 힘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친 이석영은 광복 46년째인 1991년 우리 정부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평택문화원은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석영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대표되는 선생을 선양하기 위해 올 하반기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다.

평택문화원은 경기도 지원 사업으로 올해 ▲<독립운동가 이석영> 책자 발간 ▲독립운동가 이석영 학술세미나 ▲이석영 아카이빙전시회 ▲웹툰과 홈페이지 등 이석영 콘텐츠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이석영의 업적을 다룰 <독립운동가 이석영> 책자에는 ▲경주이씨 가문의 평택시 입향 배경과 계보 ▲이석영의 출생과 성장, 관직생활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경주이씨 6형제의 삶 ▲해외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재산을 처분하는 이석영 ▲중국 서간도로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운영 ▲이석영을 통해 얻는 교훈과 선양 방안 등을 담을 예정이다.

‘독립운동가 이석영 학술세미나’에서는 경주이씨 가문의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친일과 항일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진행하고, 과거 역사와 현재의 자산을 미래적 가치로 계승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이석영 아카이빙전시회’는 국내와 중국 현지 학술연구와 현장 조사 결과를 사진과 이미지로 제작, 전시하며, ‘이석영 콘텐츠 개발’은 이석영의 생애사를 웹툰으로 제작해 청소년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이석영의 활동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보선 평택문화원장은 “이 같은 선양사업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인물인 경주이씨 이석영의 위대하고 지난한 삶을 조명해 이념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 시대의 사회통합 모델을 제시할 계획”이라며, “이석영 선양사업은 학술연구 결과물을 역사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도록 원천콘텐츠를 탄탄히 하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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