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3월 12일

지주 홍사훈 외출, 문 앞 기다려
마름 고종만 배임·횡령으로 고소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振威郡 靑北面 柏奉里에 거주하는 김현상金顯相 씨 외 十六명은 十二日 아침 그들의 지주인 경성부내 계동정桂洞町 七五의 一 홍사훈洪思勛 씨에 소작인을 대표하여 진정하려고 상경하였다. 그러나 홍사훈 씨는 외출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그들은 문전의 노변에서 지주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진정의 내용은 홍씨의 그곳 사음으로 있는 고종만高鍾萬, 四一 씨가 자기의 사리를 물리어 무리하게 소작권을 이동하고 비료대금의 중간이득을 하여 빈곤한 소작인으로서는 반격이 여간 아니라 하여 이것을 완전히 제거하자면 우선 고종만 씨를 파면하라는 것이다.(하략) (『동아일보』 1938년 3월 15일)

평택은 평야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부재지주들이 많은 만큼 소작을 하는 농민들도 많았다. 서울 계동에 사는 홍사훈洪思勛은 청북면 백봉리에 상당한 논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였다. 그는 고종만高鍾萬을 마름으로 고용하여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소작인만 120명이었다. 그런데 고종만은 소작인에게 소작인의 생계와 밀접한 소작권을 함부로 남용하고, 비료대금의 중간이익을 사취하는 등 이른바 갑질을 하였다. 이외에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건립한 진흥회 회관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한편 어린이를 위해 교육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보리와 벼 한 말씩 받아서 횡령하고 가마니 판 돈 역시 저금한다고 하면서 횡령하였다.

이러한 고종만의 갑질에 소작인은 수원지방법원에 두 차례나 배임 횡령죄로 고소하였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소작인들은 김현상 등 대표 17명을 뽑아 지주 홍사훈을 만나 고종만의 파면을 요구하기 위해 서울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홍사훈이 외출로 인해 만나지 못하고 돌아올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지주 홍사훈은 수원의 지주로 1933년 9월 용인군 기흥면 신갈의 소유지에 대한 마름제를 폐지한 바 있으며, 삼일학교와 화성학원을 지원하는 등 독지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종만 역시 1933년 1월 백봉리 빈민을 구제한 바 있으며, 1934년 4월에는 주민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른 탓인지 알 수 없지만 1938년에는 주민들에게 가장 악덕 지주와 마름이었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